
대한민국 문화예술의 위상은 이제 세계 속에서 하나의 흐름이 되었다.
K-컬처 열풍은 음악과 드라마를 넘어 영화로 이어졌고 천만 관객을 넘는 작품들이 연일 화제를 만든다.
화려한 볼거리와 자본이 집중된 상업영화 사이에서, 오히려 더 오래 마음에 남는 작품들은 조용히 관객을 찾아오는 독립영화일 때가 있다. 최근 전주의 독립영화관에서 만난 영화 역시 그런 작품이었다.
영화《저만치 가까이》
극단 <집현>의 대표이자 연극배우로 활동 중인 최경희 배우가 주연을 맡은 이 작품은, 시인이자 영화감독인 백학기 감독의 신작 독립영화다.
군산 여고를 졸업한 군산 출신의 최경희 배우는 연출가인 남편 이상희와 25년 넘게 서울 경기지역의 연극 무대를 지켜오고 있다. 연기뿐 아니라 춤과 노래, 의상제작과 연극제 심사까지 아우르는 다재다능한 예술인으로 문화예술계에서도 잘 알려진 여성 예술인이다.
지난해부터 후배의 출연 소식을 들으며 기다려온 영화의 정식 개봉에 앞서 특별 시사회로 먼저 만나게 되었다. 전주의 영화 제작소에서 감상한 영화는 깊고 조용한 울림을 주며 가슴에 남았다.
비구니가 된 엄마를 찾아 길을 떠난 20대 여성 윤지와,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한 아이를 기억하며 살아가는 중년 여성 수연의 이야기를 백학기 감독은 담담하게 풀어낸다. 서로 다른 시간을 살아온 두 여인의 상처는 각자의 에피소드 속에서 교차하며 한 편의 연작처럼 이어진다.
최경희 배우는 극 중 상실의 기억을 안고 살아가는 오십 대 여성 수연을 연기한다. 영화 전편에 흐르는 비구니 스님과의 선문답 같은 독백이 잔잔하게 다가온다. 특히 극 중 삽입된 시인 백석의 시구는 영화의 정서를 더욱 깊게 만든다.
“여승은 합장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냄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처럼 늙었다.
나는 불경처럼 서러워졌다.”
시어가 품고 있는 애잔함은 그대로 윤지의 마음이 되어 스크린 위에 내려앉는다. 엄마를 향한 그리움과 원망, 그리고 끝내 닿고 싶은 용서의 감정은 영화가 끝난 뒤에도 오래 남는다.
이어지는 수연의 서사는 더욱 먹먹하다. 세상과 만나지 못한 태아령들의 천도를 위해 놓인 빨간 모자의 아기불상 앞에서 터뜨리는 오열은 어떤 대사보다 깊은 슬픔으로 다가온다.
상실과 모성의 아픔을 절제된 감정으로 표현해 낸 최경희 배우의 연기는 강한 몰입감을 만든다. 만나지 못한 존재를 향한 미처 다 건네지 못한 마음들이 관객의 눈물과 조용히 맞닿는다. 영화 속 스님이 건네는 한마디가 오랫동안 마음에 남는다.
“때로는 볼 수 없음이 또 다른 인연일 수도 있습니다.”
이 대사는 결국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독백처럼 다가온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란 긴 시간 속에서 잠시 스쳐 지나가는 인연의 실처럼 이어지고 흩어지기를 반복한다. 어떤 인연은 함께 완성되지만 어떤 인연은 끝내 만나지 못한 채 흔적으로만 남는다.
영화《저만치 가까이》는 상처를 단순히 치유의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상처 또한 삶의 일부로 우리 안에 머무르며 함께 살아가는 것임을 조용히 이야기한다. 그래서 이 영화는 두 여성의 이야기인 동시에 관객 각자의 기억과 상처를 돌아보게 만드는 한 편의 고백처럼 느껴진다.
영화의 공간 또한 인상적이다. 전남 보성의 대원사와 전북 진안의 마이산 탑사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비 내리는 산사의 풍경은 두 여인의 슬픔을 묵묵히 품어 안는다. 고요한 산사의 풍경은 마치 또 하나의 주인공처럼 영화 전체를 감싸며 깊은 사색의 시간을 만든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시처럼 남는 대사들과 독백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관객의 아쉬운 여운을 이어가듯 영화와 함께 출간된 책《저만치 가까이 SO FAR SO NEAR》역시 특별한 감동을 전한다.
전주가 고향인 백학기 감독은 한국문학상을 수상한 등단작가로 여러 권의 시집을 발간한 시인이며 시나리오 작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그는 이번 영화
속 대사와 자신의 철학을 한 권의 책 안에 담아내며 또 다른 방식의 사유를 건넨다.
백 감독은 인터뷰에서 “해결되지 않은 감정들을 억지로 정리하기보다 그 자리에 잠시 머물러 보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영화를 통해 그런 시간을 나누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저만치 가까이》는 관객에게 잠시 멈추어 자신의 기억과 상처를 바라보게 만드는 영화다. 멀리 있는 이야기처럼 시작되었지만, 결국 가장 가까운 내 마음의 기억을 오래도록 두드리는 작품이었다.
시사회 일정
-전주 디지털 독립영화관 4월 16일
-군산 롯데시네마 4월 17일
-서울 충무로 서울 영화센터 5월 28일
-인천 5월 3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