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손잡이는 희귀성으로 인해 대부분의 운동 종목에서 성공 가능성이 높게 평가된다.
복싱 역시 다르지 않다.
아마추어는 물론이고 프로 세계에서도 이른바 사우스포가 세계 정상에 오른 사례는 무수히 많다.
아웃복싱의 전설로 불리는 우크라이나 출신의 ‘바실 로마첸코’, 인파이팅의 교과서로 불리는 필리핀의 ‘매니 파퀴아오’, 그리고 ‘탱크’라는 별명을 가진 메이웨더의 제자 ‘저본타 데이비스’가 있다.
군산 복싱계에 ‘될 성부른 떡 잎’이 나왔다. 전북권의 학생 선수들이 대부분 출전한 대회에서 중학교 1학년 나연우 선수가 우승했다.
2년의 나이차를 극복하기란 마치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렵다는 게 복싱계의 정설. 유망주 탄생에 목 말라했던 군산 복싱계에 단비가 내린 격이다.
군산 복싱계의 유망주 탄생
사우스포 복서의 추락과 재기, ‘인생 역전’ 이야기를 다룬 영화 〈사우스포(2015)〉는 왼손잡이 복서를 가장 잘 보여준 작품이다.
길거리 아이들을 거둬들여 사고를 치지 않도록 인도하는 멘토 트레이너는 주인공 ‘위대한 빌리’에게 사우스포로서의 공격과 방어 기술을 전수한다.
패배 이후 방황하던 빌리가 복서 인생을 건 재기전에서 승리하는 장면이 인상적인 영화이다.
<사우스포>의 트레이너가 보여준 헌신과 희생의 캐릭터는 군산체육관을 세워 배고픈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었던 군산복싱의 대부 고 김완수 관장의 인생과 닮았다.
어려웠던 1960년대부터 최근까지 월명동 군산체육관 1관은 군산 복싱인들에게 ‘성지’와 다름없었다.
오늘날 이 체육관은 복싱을 통한 역경 극복의 현장으로, ‘감성 관광지’로 육성하자는 시의회 제안이 나올 정도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이 체육관에서 운동 3년 차를 맞은 중학교 1학년 나연호 선수가 3학년들을 꺾고 우승하는 이례적인 사건이 터졌다.
복싱계는 군산의 유망주 탄생을 반기고 있다.
1학년이 3학년을 이기는 건 매우 ‘이례적’
지난 9월 12일부터 3일간 고창군에서 열린 전북특별자치도 도민체육대회 복싱 42㎏급에서 나연호 선수(서흥중 2학년)는 우승을 차지했다.
군산체육관 2관(나운동)에서 운동을 시작한 지 3년 만의 성과였다.
나연호 선수가 예선전부터 맞붙은 상대는 모두 중학교 3학년이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에서 2년의 차이는 흔히 ‘넘사벽’으로 불린다.
그 격차를 극복하고 우승컵을 들어 올렸으니 매우 특별하고 이례적인 결과였다.
연우는 단박에 전북권 복싱 유망주로 주목받게 되었다.
처음부터 지도해온 김형욱 관장은 연우의 성장 가능성을 높게 평가했다.
“외부 선수들과 스파링 기회를 갖기 위해 트레이닝캠프와 전지훈련을 많이 가려고 합니다. 다른 지역의 유망주나 강자들과 겨뤄야 실전 기량이 한 단계 높아지거든요.”
아직은 미숙하지만 튼실한 열매로 자랄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뜻이었다.
이번 도민체전 이전에도 몇몇 생활체육 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냈으나, 우승 문턱에서 번번이 쓴맛을 봤다.
그러나 이번에 학생 복싱에서 좀처럼 나오지 않는 2년의 격차를 이겨냈기에, 연우는 자신감을 얻었다.
“결승전에서 이겼을 때 아주 좋았어요. 제 꿈에 한 발 더 다가가는 느낌이었죠.”
전북권은 물론 전국 학생 복싱계에서 42㎏급의 강자로 자리매김한 연호.
벌써부터 복싱계에서는 “아마도 다른 선수들이 그를 피하기 위해 체급을 달리해 출전하지 않을까”하는 말까지 나온다.
스스로를 단련시키는 ‘복싱’이 좋아요
연호는 당북초 4학년 때 부모님(나승환·박선영)의 권유로 복싱을 시작했다.
“처음 체육관 문을 두드릴 때는 정말 ‘애기’ 같았어요. 그런데 지금은 눈빛이 달라졌지요.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운동하고 자세를 잡으며 기본기를 연습하거든요. 특히 체력을 길러주고 스텝·푸트워크·반사신경을 살리는 데 도움이 되는 줄넘기를 아주 잘합니다.”
김형욱 관장은 체육관 학생들 모두 열심히 하지만, 연우는 특별한 면이 있다고 했다.
연우의 줄넘기 기량은 또래에서 전국 수준에 해당할 정도이다. 가로뛰기는 물론 3단 뛰기도 능숙하다. 이는 체육관 다른 지도자들에게서 전수받은 것이다.
특히 바닥에서 높이 뛰며 줄을 엑스자로 교차시키고 2단, 3단으로 도약하는 시연을 할 때면 마치 ‘신들린’ 듯하다.
연호는 할수록 복싱이 좋아졌다고 한다.
“처음 시작할 때는 힘들었어요. 그 시기가 지나니까 나날이 체력이 붙는 걸 느꼈어요. 재미도 있었고 자신감도 생겼죠.”
복싱은 배우면 배울수록 더 배울 게 많다는 게 연우의 생각이다.
“노력하는 사람이 이길 수 있는 기회가 오는 경기라서 좋아요.”라며, 오늘도 체육관에서 뛰고 날며 땀을 흘린다.
국가대표가 되어 올림필 금메달을 꿈 꾼다.
“복싱을 시작하고 나서 생각해봤어요. 노력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는 운동이라는 점이 좋았어요.”
‘노력하는 사람이 성공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장래의 꿈과 연결 지어 어른스럽게 말했다.
오늘도 연호는 학교 수업이 끝나자마자 체육관으로 달려왔다. 줄넘기로 몸을 풀고, 자세 잡기·원투 스트레이트 같은 기본기를 반복한다.
연호의 주무기는 ‘카운터’다.
상대가 펀치를 날릴 때 순간을 파고들어 손을 내미는 기술이다. 눈이 빨라야 하고, 마음도 담대해야 실전에서 쓸 수 있다.
“작년까지는 실전 경험이 없어서 카운터를 쳐야 하는데 자꾸 뒤로 밀려났거든요. 그래서 호된 경험도 했죠. 그런데 올해 중학생이 되면서 모든 게 달라지기 시작했어요. 전지훈련 가서 스파링도 많이 했는데, 기량이 눈에 띄게 늘었어요.”
김형욱 관장은 “연호는 이제 ‘될 성부른 떡잎’이 되었다”라며 자평했다.
그러면서도 “복싱은 꾸준함이 결과를 가져다주는 운동이거든요. 지금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계속 정진한다면 국가대표의 꿈이 머지않을 겁니다.”라고 덧붙였다.
대한민국 대표선수로 성장하길
연호의 각오도 새롭다. 국가대표는 모든 면에서 귀감이 되어야 한다며, 성실하게 학교생활도 하고 운동도 더 열심히 하겠다고 다짐했다.
“부족했던 공부도 물론 잘해야겠지만, 기본기가 복싱의 처음이자 끝이라는 관장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운동에 매진할 거예요.”
군산복싱체육관에서 함께하는 형들이 있어 든든하다는 연호.
“부모님께 딱히 할 말은 없어요.”라고 했지만, 이내 “복싱 국가대표라는 꿈을 꿀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아빠, 엄마께 감사드려요.”라며 수줍게 웃었다.
연호 학생이 지금처럼 ‘처음의 자세’로 기량을 연마해 군산과 전북을 넘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복싱 선수로 성장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