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죽기 위해선 잘 살아야 한다!
나의 현재 꿈은 ‘잘 죽는 것’이다. 진심으로 잘 죽고 싶다. 이 말은 빨리 죽고 싶다는 말은 전혀 그리고 절대 아니다. 할 수만 있다면 아주 오래 오래 살고 싶다. 하지만 아무런 의미 없이 물리적인 수명만 연장한 채로 오래 살고 싶은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 산소호흡기를 비롯한 각종 생명연장 장치에 의존한 채 병상에 누워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에 갇혀 하루하루를 고통스럽게 연명해나가는, ‘차라리 안 사느니만 못한, 당연히 무의미하고 존엄하지 못한 ‘장수(長壽) 지옥’(8-9면)의 수렁에서 허우적거리며 사는 삶은 어떤 일이 있어도 피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한 삶은 나 자신은 물론 가족들에게도 엄청난 고통과 부담만 안기는 일이 될 것이다.
은퇴 이후 의미 있는 삶에 대한 기준을 정해 놓고 지내오고 있다. 그 때가 언제일지는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래도 그 때가 될수록 늦게 왔으면 하는 마음이다. 하지만 우연히 태어나 필연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249면), 따라서 그 어느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그때가 오면 미련이나 악착을 부리지 않고 죽음을 맞이하려고 한다.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되면서부터 자연스레 존엄사의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대만의 재활학과 의사인 비류잉의 『단식 존엄사』라는 책이 나를 사로잡았던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이 책은 소뇌의 신경 세포가 퇴화하는 질병인 ‘소뇌실조증’으로 투병하던 그의 어머니의 생애 서사와 단식 존엄사를 선택한 후 임종을 맞이하기까지의 전후 사정을 곡진하게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류잉은 한 인터뷰에서 “오늘날의 의료 시스템은 효과가 없는 의료 행위로 사람의 죽음을 지연시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고령화 시대, 100살 시대가 되면서, 잘못 죽는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습니다”라고 전제하면서 현재 대만에서 ‘단식 존엄사 운동’을 펼치고 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단식 존엄사는 안락사가 허용되기 전의 과도기적인 선택이 아니라 존중받아야 할 죽음의 한 방식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그는 살아 있을 때는 최선을 다해 살고, 때가 되면 억지로 연명하지 않는 것이 나 자신과 가족, 그리고 사회를 위한 최선의 선택이라고 강조하면서 우리 모두 ‘죽음 리터러시’(Death literacy)를 높여야 한다고 말한다.(「한겨레」, 2025. 2.28)
나는 이제 내년이면 세수로 일흔의 나이를 맞이한다. 이른바 ‘예로부터 드물다’는 고희(古稀)의 나이이다. 평균 수명이 60을 채 넘지 못하던 예전 같으면 꿈 같은 나이가 아닐 수 없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축복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1950년대에 태어난 세칭 산업화 세대라 불리는 우리 세대는 상대적으로 다른 세대에 비해 운이 좋은 세대라고 생각한다. 우리 세대는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성장한 부모들 세대와는 달리 망국의 설움 속에 이민족의 차별과 폭력에 시달리지 않았다. 또한 바로 윗세대 선배들과도 달리 한국전쟁의 혹독한 참화와 가난의 굴레로부터도 자유로웠다. 게다가 지금 세대들처럼 각자도생의 정글에서 죽기 아니면 살기 식의 치열한 경쟁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세대이다. 하여 축복받은 세대가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세대들은 부모들에게 효도를 하는 마지막 세대이자 자식들로부터 효도를 받지 못하는 첫 세대인 ‘낀 세대’로서의 냉소적 불만이나 하소를 토로하는 동년배들이 있다. 배부른 투정이라고 생각한다. 더욱이 개인적으로 일흔의 나이에 이르도록 이렇다 할만한 큰 곡경이나 난경에 처하는 불운이 없이 지내온 나로서는 지금 생을 마감한다 해도 크게 억울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입에 올리기 좋아하는 사람은 거의 없어 보인다. 특히 동양인들의 기휘나 금기는 더 심해 보인다. 이러한 맥락에서 ‘죽음의사’로 불리며 1996년부터 ‘자신의 죽음 생각하기 모임’을 정기적으로 열고 있는 일본의 의사 나카무라 진이치의 사례는 평가할만하다. 죽음과 관련된 담론을 주고받는 차원을 넘어 ‘수의 패션 쇼’, ‘모의 장례’, ‘내가 들어갈 관’ 같은 행사로 일본 사회에서 적지 않은 논란을 야기했던 그는 “70세부터 자신이 이미 ‘유통기한’을 넘겼으니 언제든 여한 없이 인간 세상을 떠나도 괜찮을뿐더러 하루하루가 하늘이 주신 특별한 선물”(27-28면)이라는 말을 남기고 있다. 나 또한 하루하루를 축복과도 같은 선물이라고 감사하게 생각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맞이하려고 한다. 잘 죽기 위해서는 잘 살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잘 살아야만 잘 죽을 수 있기 때문이다.
흔히 인생을 마라톤에 비유하곤 한다. 한때 취미와 건강 차원에서 마라톤을 해본 적이 있다. 완주하는 과정에서 가장 행복했던 구간은 골인 지점을 3-4킬로 정도 남겨진 지점이었다. 골인 지점을 향해 힘들게 한발 한발 내딛는 파근한 발걸음은 무거웠지만 골인 이후의 성취감을 비롯한 장면들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그 구간을 지나던 순간이 가장 홀가분했기 때문이다. 삶의 여정에서 지금 나이가 바로 그 구간에 해당되지 않나 싶다. 은퇴 이후 그 어떤 의무나 강박으로부터 벗어나 조급할 것도 서두를 것도 별로 없는 지금이 가장 행복하기 때문이다. 하여 앞으로도 오래도록 살고 싶은 생각이다. 하지만 마음대로 뜻대로 되지 않은 게 인생이라고들 한다. 지나온 70여 성상을 헤아려보면 맞는 말일 것 같다. 아니 맞는 말이다. 이 세상과 맺은 시절 인연이 다하는 그날이 언제일지는 알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날이 다가오면 죽음을 지연시킬 뿐인 무의미한 연명의료에는 의존하지 않고 생을 마감하려고 한다. 연명 의료 행위는 환자와 가족들에게 고통과 비용만 전가할 뿐이기 때문이다.
명재경각(命在頃刻)의 말기 환자들에게 단식 존엄사가 합리적이면서 매력적인 선택지가 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먼저 대부분의 사람들이 피했으면 하는 장수 지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점이다. 죽음을 목전에 둔 말기 환자들에게 무의미한 연명 치료를 시도하는 것은 정이나 법에 구속된 다양한 이유로 차마 포기하지 못하는 가족들이나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일이야말로 자신들의 소명이라고 생각하는 의사들 때문일 것이다. 당연히 존중해야 할 이유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몸에 여러 튜브를 꽃은 채 침대에 누워 대소변을 보고,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고, 사지가 뻣뻣해진 상태로 매일 자그마한 침대에서만 생활”(213면)하는 이른바 ‘식물인간’ 상태로 죽음만을 기다려야만 하는 상황이라면 연명치료가 환자에게 과연 최선의 선택인지, 그리고 누구에게 도움이 될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다른 하나는 임종을 앞두고 소중한 가족들을 비롯한 친지들과 생의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할 수 있다는 점이다. 많은 사람들이 ‘죽을 복’과 관련하여 잠을 자다가 죽는 줄도 모르고 그냥 생을 마감했으면 좋겠다는 말들을 많이 하고들 한다. 이러한 죽음은 망자의 입장에서만 보면 좋은 일일지도 모른다. 고통 없이 생을 마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은 가족들이나 친지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보다 더 황망하면서도 허망한 일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찌 그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을 더 이상 볼 수 없는 생의 마지막 순간에 변변한 마지막 인사 한마디조차 하지 못한 채 황망하게 떠나버리면 남은 가족들의 심정은 어떻게 될 것인가? 맺힘과 풀림, 만남과 헤어짐의 연속인 우리의 인생에서 이별은 중요한 의식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임종을 목전에 둔 망자와의 작별 인사는 다른 이별과는 비교 자체가 언어도단일 정도로 중요한 의식일 것이다. 제대로 된 변변한 작별 의식 없이 망자가 갑자기 떠나버리는 경우 “화해, 사과, 감사, 사랑의 말을 미처 전하지 못한”(220면) 회한이나 자책으로 인해 가족이나 친지들의 마음 속엔 수습하기 힘든 죄의식이나 응어리가 오래도록 남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어머니를 주인공으로 모셔 어머니의 노력과 희생, 일생 동안 이룬 것들을 함께 보면서 진심으로 어머니에게 존경과 사랑을 표현”(161면)한, 비류잉이 소개하는 어머니의 인상적인 생전 장례식 장면은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뿐만 아니라 사후 장례가 지배적인 우리들의 장례 문화에 신선한 자극을 제공한다. 더불어 사전 장례식에서 가족들에게 유언의 형식으로 전한, “아주 만족스럽다! 난 훌훌 떠날 테니 울지 말거라.”(162면)는 어머니의 마지막 작별 인사 또한 적지 않은 울림을 준다.
전직 대통령 6명의 장례 절차를 이끌며 ‘대통령의 염장이’라는 별명을 가진 장례지도사이자 천만 영화 ‘파묘’에서 유해진이 연기한 인물의 뼈대를 제공한 당사자이기도 한 유재철 대한민국장례문화원 대표는 “소풍이나 수학여행, 해외여행도 계획을 짜는데 왜 가장 중요한 여행을 위해서는 계획을 세우지 않을까요? 많이 계획할수록 인생의 마지막 여행도 잘 떠날 수 있습니다. 자전거나 스키를 잘 타려면 자꾸 넘어져봐야 하잖아요. 죽는 것도 연습하듯 많이 생각해봐야 잘 떠납니다. 죽음을 모르면 절반은 모르고 사는 인생이라고 하잖아요.”(「한겨레」. 2025.3.13.)라고 말하고 있다. 이 연장선에서 “죽음은 삶의 일부이며 태어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인 것처럼 죽음 또한 자연스러운 일이다. 고통 없이, 존엄하게 자연사하는 것이야말로 인류의 궁극적인 행복이다.”(14-15면)라는 저자의 말로 이 글을 매조지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