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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 만에 천만 원 빚진 일, 또다시 시작하는 ‘초미남’ 셰프
글 : 배지영(시민기자) / okbjy@hanmail.net
2014.12.01 10:14:09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열려진 버스 유리창으로 검은 손이 들어왔다. 같이 학교 건물을 짓고, 같이 운동을 했던 그 손은, 잘 가라는 뜻으로 스물네 살 청년 김대열의 뺨을 톡 쳤다. 어루만졌다. 절대 울지 않을 거라고 다짐한 대열은 엉엉 울었다. 외국에 한 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온 아프리카, 지갑에 돈 한 푼 없이 현지인들이랑 똑같이 먹고 잔 1년이었다. 

 

“제가 다시 케냐에 와서 걔를 볼 일이 없잖아요. 그래서 눈물이 쏟아졌나 봐요. 한국 가면 정신없이 살겠죠. 돈 벌고, 결혼하고, 금방 흰머리 난 중년이 되잖아요.” 

 

군대 제대하고 대학에 복학한 대열은 게시판에 붙은 해외봉사활동 전단지를 보았다. 100% 자비를 들여서 가는 봉사활동, 그는 일본과 태국을 경유해서 아프리카 케냐로 갔다. 해발 1600m에서 현지인들이랑 똑같이 만다지(빵)와 우깔리(옥수수 떡)를 먹으면서 살았다. 담배도 끊었다. 대열은 “청정 그대로의 몸이 됐네” 하며 자신의 몸을 흐뭇하게 봤다.  

 

 

그는 한 달 동안 동료와 둘이 무전여행을 했다. 한 없이 걷다가 흙더미를 싣고 가는 화물차를 얻어 탔다. 많이 얻어먹고 노숙도 했다. 말라리아에 걸려서는 어떤 집에 얹혀서 누워있었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말라리아를 심각하게 생각 안 했다. 감기처럼 여겼다. 알약 한 알 먹고 밥 먹으면 낫는다고 생각했다. 대열은 사흘 만에 일어났다. 돈 없어도 행복했다. 

 

 

“커서 냄비 장수 될 거야.”

 

어린 대열은 항상 그렇게 말했다. 어머니가 음식 할 때, 옆에서 돕는 걸 좋아했다. 군산 서흥중 2학년 때 우리나라 최초로 생긴 한국 조리과학고등학교를 알게 되었다. “저기 가야겠다.” 공부를 잘 하는 편이 아닌 대열은 처음으로 학업에 시간과 정성을 쏟아 부었다. 1년 동안 열심히 해서 바라던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일반 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 하고 싶은 일이 뭔지를 고민할 때에 조리고등학교 학생들은 분명한 목표를 향해 매진한다. 생긴 지 얼마 안 된 학교, 번듯해 보이는 정면의 학교 건물 뒤는 철근이 나와 있는 공사장이었다. 자기 꿈이 확실한 학생들은 불평하지 않았다. 배우려는 의지가 충만했다. 대열도 그랬다. 뜨거웠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칼질을 배워요. 무생채 썰기 대회도 열리고요. 자기 손가락 써는지도 모르고 막 해요. 진짜 얇게 써는 친구들은 바늘귀에 들어갈 만큼 썰기도 해요. 얇게, 빨리, 곱게 써는 것에 비중을 두죠. 1학년 때는 한식과 양식을 배워요. 자격증 위주로요. 2학년 때는 중식하고 일식, 3학년 때는 고급 요리를 배워요.” 

 

유명한 요리사들이 학교에 와서 요리하는 것도 보여주고 강연도 한다. 돼지 한 마리를 통째로 해체작업 하는 것도 볼 수 있다. 학생들은 각종 요리대회에 많이 나간다. 대열은 나온 재료만 가지고 에피타이저, 스프, 메인, 디저트를 만드는 ‘블랙박스 요리대회’에 나갔다. 한 달 동안 합숙하면서 연습했지만 입상은 못 했다. 그래도 배운 게 많아서 좋았다. 

 

대열은 어떤 한 교수님만 보고서 안동의 가톨릭 상지대 조리과로 갔다. 입학해 보니까 그 교수님은 다른 학교로 옮겨간 뒤였다. 학교는 요리 실습동도 항상 개방하지 않았다. 더구나 수업은 대열이 고등학교 때 배운 칼질부터 시작했다. 이미 자격증까지 딴 대열은 아무 것도 하기 싫었다. 그는 1학년 1학기를 마치고 입대해 버렸다.  

 

제대하고 아프리카에 다녀온 대열은 학교 복학해서 열심히 공부하고 요리를 했다. 전 과목 A학점을 맞고서 2학년 2학기 때 서울로 실습을 갔다. 도곡동 타워펠리스 맞은편에 있는 테이블 10개짜리 레스토랑, 파스타를 팔았다. 사장님은 대열에게 모든 습관을 바꾸라며 밥 먹을 때도 욕했다. 대충대충 하지 말라고 행주 빠는 것부터 가르쳤다. 버티는 사람이 없었다.

 

“3개월 일하고 나서 정장 입고 갔어요. 청소를 싹 해줬어요. 그리고는 ‘당신 밑에서 못하겠다. 근데 많이 배웠다’고 했어요. 그 때 하루 14시간씩 일하고 130만원 받았어요. 휴대폰비랑 고시원비 내고, 생활비 하면, 모아지는 돈이 없었어요.” 

 

대열은 압구정에 있는 크고 작은 레스토랑을 돌며 2년간 일했다. 워커힐 호텔에 가서도 3개월만 일했다. 130만원으로 시작한 월급은 진득하게 일했다면 오를 수도 있었겠지. 그러나 명동의 꽤 큰 레스토랑에서 오래 일한 선배가 “메인 셰프가 3백만 원 받는데 그게 내 미래야”라고 했을 때에 ‘빨리 일 배워서 장사하자’고 결심을 굳혔다. 

 

스물여섯 살 요리사 김대열, 그는 ‘내 가게’를 하고 싶었다. 통장에 돈은 없었다. “나중에 한 명이 잘 되면 끌어주고, 못 되면 도와주자”고 말한 고등학교 때 친구 윤영재한테 전화를 했다. 영재는 삼성 외식사업부에 다니며 월급 200만원을 받고 있었다. 대열은 자기 고민을 솔직담백하게 말했다.  

 

“영재야, 나 장사하고 싶어. 파스타 집.”

“어떻게?”

“트럭 사가지고. 가스 불판 깔고 장사하면 되지 않냐? 트럭 알아봤는데 3백만 원이야.”

 

영재는 트럭 값을 보내줬다. 대열은 트럭 안을 세팅하기 위해서 3백만 원을 더 신용대출 받았다. 천막까지 만들었다. 압구정에 살던 때라서 가로수 길 끝에서 유원지로 빠지는 곳을 조사했다. 시간당 50명이 지나갔다. 그 중 10%, 1시간에 5명만 와도 좋겠다는 목표를 잡았다. 8천원에서 1만원 하는 파스타를 팔았다. 2011년 7월 1일이었다. 

 

“제가 복이 있어요. 손님들이 간이 테이블까지 꽉 찼어요. 하루 매출이 15만원에서 20만원. 재밌는 게, 손님들이 ‘주인 초미남’ 하면서 SNS에 막 올렸어요. 소문이 쫙 나서 포장마차인데 예약제로 장사를 한 거예요. 영재는 수원이 직장인데 1시간 40분 동안 차를 타고 압구정까지 와서 도와주고 갔어요.” 

 

 

영업시간은 밤 9시부터 다음 날 새벽 3시. 대열은 파스타 그릇 50장을 고시원에 갖고 와서 설거지하고 뒷정리를 했다. 그러고나면 아침 7시, 잠깐 눈 붙이고서 낮에 일어났다. 장을 봤다. 여름이니까 얼음 사다 맥주까지 팔았는데 재미있었다. 고시원 냉장고가 작아서 따로 큰 거를 사서 들였다. 냉장고에 요리 재료 넣는 것도 재미있었다. 모든 것이 그랬다. 

 

 

대열은 한 달 만에 단속에 걸렸다. 모은 돈도 없는데 벌금 맞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마침 트럭으로 타코 장사하는 형님이 인천 락페스티벌 행사에 가자고 했다. 영재가 천만 원을 대출받아 줬다. 사흘간의 푸드 코트 입점비 3백만 원 내고, 나머지는 몽땅 재료를 샀다. 그걸 트럭에 꽉 차게 실었다. 대열은 “이거면, 천만 원 벌고 나오겠다!” 완전히 신이 났다. 

 

“비가 많이 왔어요. 혼자 냉장고를 옮기는데 차가 진흙에 빠졌어요. 다른 푸드 코트는 네다섯 명이 와서 일하는데 저는 혼자였어요. ‘영재가 나한테 천만 원도 줬는데...’ 그래서 이 악물고 세팅했어요. 파스타 천 명분을 준비했는데 장사가 안 됐어요. 냉차 파는 데만 잘 됐어요. 8월이었고, 습하고. 사흘 만에 천만 원을 다 까먹은 거예요.” 

 

압구정 고시원으로 돌아온 대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마침, 그의 트럭에 와서 파스타를 사먹던 사람을 길에서 만났다. “저, 단속 맞았어요”라고 했더니 그 사람은 장소가 있다고 했다. 차가 두 대 들어가는 상가 주차장이었다. “밤에는 비어요.” 대열은 월세 100만원에 임대차 계약서를 쓰고 사업자를 냈다. 그 정도 월세는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처음에는 트럭을 세워놓고 장사를 했다. 그런데 웬걸! 엔진오일을 안 갈아서 트럭은 고장 나고 말았다. 대열은 주차장에다 해체형으로 가게를 만들었다. 떼었다가 붙일 수 있는 세시를 달았다. 그곳은 낮에는 주차장, 밤에는 대열의 가게가 되었다. 그런 걸 재미나게 여긴 손님들이 저마다 블로그에 대열의 가게를 올려주었다. 장사는 잘 됐다.

 

“변수가 생겼어요. 주차되어 있는 차가 밤 9시 지나도 안 빠질 때가 있어요. 그래서 낮에 도시락 장사를 했어요. ‘청춘도시락’이라고, 압구정에 전단지 뿌리고 다녔어요. 치킨 마요, 카레 덮밥, 소고기 덮밥을 3,900원에 팔았어요. 군대 선임이었던 김은영 형도 우연히 찾아왔어요. ‘혼자 하는데 너무 힘들어.’ 형도 장사하고 싶어 해서 같이 헤쳐 나가자고 했죠.” 

 

대열과 은영이 형은 스쿠터를 사서 도시락 전단지를 뿌렸다. 바비큐 오븐을 사서 케밥까지 만들어 배달했다. 찾는 사람들이 많았다. 주차장에서는 저녁 장사를 했다. 입소문을 타고 <지큐>나 <바자르> 같은 잡지사가 와서 촬영도 해갔다. “너무나 재밌는 거예요.” 대열은 신이 나서 달마다 소주나 맥주와도 잘 어울리는 이탈리안 음식 메뉴를 개발했다. 

 

대열이 밑바닥에서 무턱대고 연 파스타 집은 6개월째 성업 중이었다. 2012년 2월, 건물주는 느닷없이 그를 찾아와서는 “월세를 2백만 원으로 올려줘야겠어”라고 했다. 장사는 계속 재투자를 해야 했다. 월세 내고, 대열을 믿고 온 은영이 형 월급을 줘야 했다. 대열은 분명히 월세 백만 원으로 임대차 계약서를 썼다. 그 두 배를 낼 순 없었다. 마음이 딱 정리됐다. 

 

“영재랑 은영이 형이랑 나랑 셋이 다 청춘이고, 나중에 호텔 하는 게 꿈이니까 ‘청춘호텔’이라는 이름 달고 한 장사였어요. 망한 거죠. 저는 나락으로 떨어졌고요. 잠원 지구에서 한 달 장사하고 접고, 락페스티벌에서 완전 망하고. 주차장에서 장사하니까 가게 꾸미느라 또 빚  내고. 고시원비도 못 내니까 은영이 형네 집에서 얹혀살게 됐어요.” 

 

그가 완전히 나가떨어진 건 아니었다. ‘돈 벌어서 작은 가게부터 하자’고 결심했다. 그러나 레스토랑으로 가지 않았다. 한 달 월급 2백만 원으로는 돈을 모을 수가 없다. 이일 저 일을 하다가 부동산 영업 시장으로 갔다. 출퇴근이 힘들어서 부동산 사무실에서 잤다.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일하고, 한숨 자고 밤 12시에 일어나 강남 전 지역에 전단지를 붙였다.

 

가뭄에 콩 나듯 실적이 나왔다. 야전침대서 쪼그려 자니까 허리만 망가졌다. 그는 은영이 형과 저녁 10시부터 새벽 2시까지 고등학생들 틈에 끼어서 맥도날드 배달 알바를 했다. 4시간 일하면 햄버거 하나를 줬다. 재미가 없는 편도 아니었다. 그는 또래인 가게 점장과 농담하면서 많이 웃었다. 진짜로는 벌리는 돈이 없어서 답답했다.

 

“빚 갚아줄 테니까 집으로 와라.”

 

작년 3월, 대열은 부모님 말을 듣고 군산으로 내려왔다. 그는 집에 누워서 “스물여덟 살인데 아무 것도 된 게 없잖아요” 하며 짜증을 삭혔다. 몸과 맘이 추슬러질 때까지 그러고 있었다. 영재랑 은영이 형한테 미안했다. 대열이 다시 한 일은 지방과 서울을 다니며 화장품 판매, “젊은 친구가 열심히 하네” 하면서 사주는 사람이 늘어났다. 1년 넘게 일했다.  

 

올해 5월, 대열의 어머니는 “네가 서울에서 했던 ‘청춘호텔’ 해 봐”라고 했다. 대열은 무서웠다. 요리를 하는 것도, 발목을 묶는 장사라는 것도. 그런데도 마음이 갔다. 사람들이 “너는 석고보드도 못 붙이고, 가구도 못 짤 거다”라고 해도 혼자서 가게 공사를 했다. 철거하고, 가구 짜고, 타일 붙이고, 철판 작업을 했다. 서울에서 파스타 트럭을 만들 때처럼. 

 

돈이 없는 그는 3개월 동안 ‘셀프 공사’를 하고 ‘청춘호텔’을 열었다. 테이블 세 개에 바 테이블 하나. 가게 절반을 차지하는 주방은 오픈, 요리하는 모습이 다 보인다. 그는 “인색하지 않게 장사하고 싶어요. 제가 요리하고 서빙도 해요. 손님들이 음식에 질문을 하면, 정확하게 답변할 수 있죠”라고 했다. 테이블 세 개가 꽉 차서 두세 번 회전하는 지금이 좋다고 했다.  

 

압구정에서 대열과 ‘청춘호텔’을 같이 했던 은영이 형은 서울에서 터를 잡고 부동산 실장으로 일한다. 음식 사업에 대한 꿈은 여전하다. 11월 말이면 군산으로 내려와서 대열과 함께 일할 예정이다. 자신이 대출받아 온 돈 천만 원을 대열이 날려먹었을 때도 “잘 놀았다”고 한 영재는, 그 경험을 밑천 삼아 회사를 나왔다. 신사동에서 음식점 ‘아웃도어 나무’를 한다. 

 

장사는 인생과 같다. 빚을 질지 돈을 벌지 앞날은 모른다. 그래서 대열은 “우선, 재밌는 가게로 자리 잡고 싶어요. 사람들이 아지트처럼 올 수 있는 작은 가게요” 라고 말했다. 곤두박질을 많이 치고서도 여전히 낙관주의자인 셰프 김대열. 그는 가게 잘 돼서 군산 은파로 진출하고 싶단다. 하지만 돈 벌어서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은 따로 있다고. 

“영재 머리가 많이 빠졌어요. 열심히 돈 벌어서 머리카락 심어줘야지요.”

 

군산 청춘호텔 

010-4321-4413

나운동 맥도날드 건너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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