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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답을 팔아가며 의병에 투신한 분의 큰 뜻을 어떻게 헤아릴 수 있겠어요!”
글 : 조종안(시민기자) / chongani@hitel.net
2013.07.01 13:32:21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해마다 열리는 군산 3·5 독립만세운동 재현 행사와 옥구농민 항일항쟁 기념행사 등에서 알 수 있듯 군산·옥구지역 유림과 농민들은 끊임없는 항일 투쟁을 벌여왔다.  명성황후 시해사건(1895)에 격분한 유생들이 그해 10월 일으킨 ‘을미의병’을 시작으로 중요한 시기마다 전국에서 의병들이 봉기했고, 군산 지역에서도 구국의 횃불이 높이 타올랐다. 

 

 

군산은 전국 어느 도시보다 많은 의병을 배출한 고장이다.  그럼에도 드러나지 않은 역사가 많아 아쉬워하던 참에 고봉민(1862~1919) 의병장 충혼비 제막식이 제3회 의병의 날(6월 1일) 군산시 옥구읍 옥정리 선영에서 엄숙히 개최됐다.  고병우 (사)한국경영인협회 회장(고봉민 의병장 손자)은 후손 인사말에서 친조부인 고봉민 의병장 순국 94년이 되는 해를 맞이하여 충혼비를 세워준 군산시장과 군산문화원장을 비롯한 군산시민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조상이 물려준 전답 처분해서 군자금으로 조달한 고봉민 의병장

“송재(松齊) 고봉민 의병장은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일본의 강제로 체결(1905년)된 이듬해에 의병운동(義兵運動)의 맹주이신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 선생을 모시고 돈헌 임병찬(遯軒 林炳瓚) 선생이 주동하여 일으킨 무성서원 병오창의(武城書院 丙午倡義)에 솔선 참여하셨다···. (독립의사 고봉민 의병장 충혼비 비문 머리글)

   

고봉민 의사는 조선 철종 13년(1862) 2월 26일 전북 옥구군(군산시) 옥구면 옥정리에서 고인시(高鱗時) 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일서, 호는 송재, 본관은 제주이며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사서삼경을 통달했고, 충의를 갖춘 효자였다 한다.  일찍이 임병찬 선생과 사제의 연을 맺은 그는 정세에도 밝았으며 덕망 있는 유학자로 후학들에게 한학을 가르쳤다. 

 

병오창의는 1906년 2월과 6월 정읍시 칠보면에 있는 무성서원 중심으로 면암 최익현과 돈헌 임병찬이 일으킨 항일 의거이다.  임병찬은 그 해 6월 순천 전투에서 최익현과 함께 체포되어 일본헌병에 의해 서울로 압송, 2년 형을 선고받고 일본 대마도에 감금됐다가 1909년 1월 특사로 풀려난다.  임병찬이 체포되어 의병이 흩어진 뒤에도 고봉민 의사는 숨어다니며 투쟁을 계속하였다.

 

경술국치(1910년)로 일본에 국권을 빼앗긴 고종은 1912년(조선개국 521년) 전라남도 순무대장(종2품)을 지낸 임병찬 장군에게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하라는 밀지를 내린다.  또한, 고봉민 의사에게는 특승 종3품 통훈대부 작위를 내리고, 독립의군부 전라 순무영 경리관 겸 만경군 소모관으로 임명한다. 

 

 


 

진즉 30대 목민관으로 큰 공을 세웠던 임병찬 장군이 전국적인 의병활동을 계획하자 고봉민 의사는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재산과 논밭을 팔아 군자금을 조달하고, 모병 활동에 전력을 다한다.  기록에 의하면 고종의 칙서를 받은 당시 대한독립의군부 참여 의병은 각 군(郡)·도(道) 대표 27명과 군(軍) 대표 30명을 포함하여 총 329명이었다.  그중 군산(옥구·임피) 출신 의병이 가장 많았다는 것은 우리 고장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  고봉민, 이준영, 김덕장, 전오풍 등 주동인물도 가장 많았다. 

 

임병찬 장군의 참모로 의병에 투신, 모병을 위해 각지로 다니며 항일 투쟁을 전개하던 고봉민 의병장은 1914년 일본 관헌에 체포되어 옥고에 시달리다 음식을 먹지도, 소화도 못 해서 말라 죽어가게 된다는 ‘기울병’에 이어 풍증까지 발병하였다.  1916년에는 임병찬 장군이 거문도에 유배 중 자결했다는 소식을 듣고 실어증까지 겹치면서 3년여의 혹독한 옥고를 치르고 석방된다.

 

중병환자 몸으로 귀향한 고봉민 의사는 긴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3·1 만세운동(1919)에 앞장선다.  이 때문에 지병이 악화하여 부인 서표산(徐瓢山) 여사의 지극정성 간호를 뒤로하고 그해 6월 5일 망국지탄의 설움 속에 순국하였다.  향년 56세. 정부는 의사의 순절을 높이 받들어 1990년 12월 20일 독립유공자로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온화한 이미지에 단호함이 느껴졌던 고병우 회장

 

지난 6월 19일(수) 오후. 건설부 장관과 한국증권거래소 이사장을 역임한 고병우(81) 회장을 군산 근대역사박물관 앞에서 만났다.  그는 대학원생 시절 교수로 출발해 농림부와 재정부를 거쳐 건설부에서 공직 생활의 정점을 찍었다.  하급 직원에게도 존칭어를 쓰는 장관으로 알려진 고 회장.  그는 반세기 넘는 공직 생활이 몸에 밴 탓인지 부드럽고 온화한 이미지를 풍기면서도 단호함이 느껴졌다.  고 회장은 몸을 지팡이에 의지할 정도로 거동이 불편했으나 옛일들을 어제 일처럼 기억했다.

 

고 회장은 근대역사박물관 입구에 세워진 노산 이은상 선생의 <故鄕 길>이 음각된 시비(詩碑)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2011년 10월 박물관 개관을 기념하여 고 회장이 세웠으며 고향이 생각날 때마다 암송한다고 했다.  특히 “얼싸 부둥켜안고 같이 살아야겠네, 이 길은 고향 가는 길 춤추면서 가는 길” 대목을 읊조리며 향수를 달랜다며 회상에 잠겼다.  뒤에는 할미산 기슭 玉井골(옥정리)에서 태어난 출향민 고병우가 이곳을 찾는 모든 분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읊고 싶을 때 도움이 되길 바란다는 인사말이 음각되어 있다. 

    

할미산은 마을의 진산으로 고은 시인이 문학의 꿈을 키웠던 곳이며 <만인보>에도 등장한다.  산에 오르면 서해와 장항제련소 굴뚝이 아슴하게 보이고, 군산 시내도 시야에 들어온다.  옥정골에서는 할미산 기슭 서쪽 용둔리에서는 고은 시인, 동쪽 지곡리에서는 고두모 대상그룹 회장, 남쪽 옥정리에서는 고병우 장관이 정기를 받아 태어났다는 얘기가 전해진단다.  

 

 

 

“우리가 사귄 세월을 나이로 치면 환갑, 진갑 다 넘었죠!”

 

고병우 회장과의 만남은 최원섭 군산체육회 고문과 자리를 함께했다.  두 사람은 끈끈한 우정을 60년 넘게 지켜오고 있는 중고등학교 동기 동창.  두 사람은 “우리가 사귄 세월을 사람 나이로 치면 환갑, 진갑 다 넘었다”며 환하게 웃는다.  고 회장은 “고향이 생각나면 전화 통화도 하고, 군산에 내려올 때마다 빠지지 않고 만나는 사람이 이 친구”라며 최 고문의 손목을 살포시 잡았다.  그동안 궁금했던 고 회장 학창시절 얘기를 더 듣기로 했다. 

  

일제강점기 옥구군 옥구읍 옥정리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지는데 코흘리개 시절 아름다운 추억 하나만 소개해달라는 질문에 “초등학교 5학년 때 해방이 됐는데, 아름답거나 애틋한 추억은 없어요.  집에서 옥구초등학교까지 2km 정도 되는 거리를 시계추처럼 오가기만 했지 공부를 못했거든요.  글씨도 잘 못쓰고 낙제를 겨우 면하면서 다녔으니까요.  그래도 다행히 해방 후부터 열심히 공부해서 경쟁률이 가장 높았던 군중에 입학했고 중·고등학교를 군산에서 다녔죠.  만약 군산중학에 입학을 못했으면 이 친구(최원섭)도 만나지 못했을 겁니다.”라며 활짝 웃는다.

 

지난 6월 1일 고봉민 의병장 충혼비 제막식이 있었고, 할아버지가 의병장이었다는 사실을 언제 누구를 통해 알았냐고 묻자  “어려서는 모르다가 해방 후 아버지를 통해 알았지요.  을사년(1905)에 태어난 아버지(고수장)도 할아버지 독립정신을 이어받았는지 전주고보 2학년 때 항일시위운동에 앞장섰다가 퇴학을 당했어요.  그래서 일제강점기에는 할아버지 얘기를 들을 수가 없었죠. 공부만 열심히 하셨으면 출세했을 터인데..  (웃음) 아버지는 그때 신학문을 그만두고 한학에 매진하셔서 훗날 옥구향교 전교도 하시고, 성균관 전의, 성균관 부관장 등을 역임하셨죠.”라며 대답한다.

 

그는 중학교 2학년 때 지금의 옥구 한림동 염의서원 현판(어필각:御筆閣)을 썼다. 혹시 학교 다닐 때 공부벌레 아니었냐는 질문에는  “초등학교 때부터 서당에 다니면서 사자소학, 명심보감 등을 떼었고 중학교에 입학해서도 아버지 권유로 서예를 배우게 됐죠.  열심히 하다 보니 열다섯 살 때 어필각을 쓰게 됐는데, 지금은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더군요.  그리고 공부벌레는 아니었지만 대한 진학 준비는 열심히 했습니다.  6·25전쟁으로 혼란한 시기였는데 한눈을 팔지 않은 노력의 결과로 가장 어렵다는 서울대학교 시험에 합격할 수 있었지요.”라며 활짝 웃는다.

 

고 회장 얘기가 끝나기 무섭게 옆에서 듣고만 있던 최원섭 고문이 손사래를 치며 입을 열었다.  고 회장은 학창시절 공부를 누구보다 열심히 했으며 급우들과 어울릴 때는 농담도 잘하고 분위기를 이끌기도 해서 교우관계가 좋았다는 것.  최 고문은 “고 회장은 사리에 밝고 마음이 따뜻해서 친구도 많았다”고 덧붙였다.

 

할아버지 고봉민도 아버지 고수장도, 고병우 회장도 외아들이라 한다, 이에 고 회장은 “목숨이 하나밖에 없다는 것을 아셨을 터이고, 의무적으로 나가야 하는 의병도 아닌데 조상에게 물려받은 전답까지 팔아가며 의병에 투신한 할아버지의 큰 뜻을 어떻게 헤아릴 수 있겠어요!”라고 말한다. 약 3시간여에 걸친 인터뷰는 도도히 흘러온 항일 역사의 강줄기를 따라 달려온 느낌이 들었다.

 

고병우(髙炳佑, 1933년 11월 2일 ~ )는 대한민국의 경제관료이자 기업인, 금융인이다.  전북 군산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했고, 청와대 대통령 경제비서관, 재무부 재정차관보, 쌍용중공업 부사장, 쌍용투자증권 사장, 한국증권거래소 이사장, 제28대 건설부 장관, 1997년 동계 유니버시아드 조직위원장, 동아건설 회장, 대한통운 대표이사회장, 한국경영인협회 회장 등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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