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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후된 군산 경제, 야구로 살리겠다고 다짐했지!
글 : 조종안(시민기자) / chongani@hitel.net
2013.07.01 13:11:27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군산상고의 오랜 숙원사업이던 인조잔디구장이 준공됐다.  군산상고 총동문회는 지난 4월 21일 학교 운동장에서 준공식 및 체육대회를 개최했다.  '군산 야구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용일 전 한국야구위원회(KBO) 총재대행도 참석해 기쁨을 함께 나눴다.  행사장에서 만난 이용일 전 KBO 총재대행에게 그의 야구인생을 들어봤다.  '역전의 명수 군산상고'를 탄생시킨 이용일(83) 전 KBO 총재권한대행.  그는 1931년 전북 군산에서 태어나 군산중학교 1학년을 마치고 가족을 따라 서울로 올라간다.  서울 경동중학교(5년제) 2학년 때 야구를 시작, 서울상대 야구부, 육군야구단 등에서 내야수로 활약한다. 그의 선수생활은 고작 7년.

 

국가대표를 지낸 매부(유복룡)의 권유로 야구를 시작한 이용일은 1950년 서울 상대에 입학해 야구부에 들어간다.  동료 선수는 장태영·박정표(이상 경남중), 이호헌(마산중), 김의석(광주서중), 김재복(인천중), 김홍일·문명채(대구상) 등 각지에서 올라온 야구 준재들이었다.  평소 성격이 활달했던 이용일은 훗날 한국 야구계를 이끌어갈 그들과 친분을 쌓는다.  이용일은 1950년 6월 23일 동대문구장에서 개최된 전국 학도호국단 체육대회에 출전, 24일 성균관대를 누르고 25일 연세대와 준결승전을 앞두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으로 대회가 중지되고 특과장교로 입대한다.  그해 10월 육군 소위로 임관하고, 1952년 육군 정훈감 김천경 장군으로부터 육군 야구단에서 선수로 뛰라는 명령을 받아 야구와의 인연을 이어간다. 

 

고향에 초중고 야구팀 여섯 개 창단시켜

1956년 소령으로 예편한 이용일은 고향으로 내려온다.  이듬해 3월에는 스물일곱 젊은 나이에 경성고무(주) 상무이사로 취임, 경영 일선에 뛰어든다.  그러나 공장과 사무실만 오가다 보니 체중이 100kg이 넘어가고 몸이 둔해졌다.  안 되겠다 싶어 동호인들을 모아 야구를 시작한다. 순전히 살을 빼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텅 빈 운동장을 보면서 마음이 달라진다.

 

"열서너 명이 캐치볼, 배팅 연습을 주로 했어.  도 대표로 전국대회에 출전도 했으니까 대단했지.  동호인 중에는 훗날 군산상고 초대 감독을 지낸 최동현도 있었고, 내가 육군 야구부 장태영 감독에게 추천해서 정식으로 야구를 시작, 프로야구 청보팀 코치를 지낸 김금현도 있었어.  1960년 육군 야구부에 입단한 김금현은 1963년 국가대표로 발탁돼 김응룡·박현식 등과 함께 제5회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일본을 꺾고 우승하는 쾌거를 이뤘지.  연습은 주로 군산중학교 운동장에서 했는데 이상한 걸 느꼈어.  서울은 럭비·야구·축구팀들이 운동장을 서로 사용하려고 경쟁했거든.  그래서 '장껨뽕'(가위바위보)을 해서 한 시간씩 운동장을 사용했어.  그런데 군산은 방과 후가 되면 운동장에 파리 한 마리 없는 거야. 혹시나 해서 여학교를 가 봐도 마찬가지로 썰렁해.  운동부가 없어서 그런지 교내에 활력도 없고, 시내에는 깡패학생 천지고 말이야... 그래서 '야구를 육성해야겠다!'고 결심했지." 

 

가난과 낙후된 경제로 상급학교 진학률이 바닥을 헤매는 군산을 야구로 살리겠다고 다짐한 이용일은 꿈나무를 육성, 중·고교로 이어지는 피라미드 형식의 야구단을 구상한다.  자신의 뜻을 몇몇 야구인에게 전하고, 초등학교 교장들을 만나 설득하면서 지도자를 물색한다.  그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1962년 2월 군산초교, 남초교, 중앙초교, 금광초교가 야구부를 창단한 것.  이용일은 야구 용품은 물론 코치들 월급까지 부담했다.  매년 2회씩 리그전도 개최했다. 대회가 정기적으로 열리자 학생들이 흥미를 두기 시작했다.  중학교 입시경쟁이 치열할 때여서 학부모들 관심도 높았다.  이용일은 당시 초등학생들이 가장 선망하는 군산중학교 교장을 찾아가 성실한 선수를 추천할 터이니 특기생으로 입학시켜달라고 설득한다.  그리고 1964년부터 추천받은 초등학교 졸업생들이 군산중학교에 진학하게 된다.  동아리 수준이었던 군산중 야구부도 이때부터 골격을 제대로 갖추기 시작한다.

 

군산중학교에 들어간 선수들이 졸업하는 1967년 초, 이용일은 군산고 최도철 교장을 만나 야구부 창단 약속을 받아낸다.  당시 그의 직책은 경성고무(주) 사장. 그는 그해 전라북도 야구협회장을 맡으면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최 교장은 적극 나서지 않았고, 지원금도 사용처가 불투명했다.  장비 대신 현금을 보내달라는 요구에는 화가 치밀었다.  "나는 군산고를 1년밖에 다니지 않았지만, 큰형 작은 형이 졸업한 학교야. 또 중학교에 야구부가 있으니까 조건이 좋잖아.  그런데 그게 아니더군.  군산고를 고집하다가는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겠더라고.  그래서 목표를 수정하고, 서울로 올라가 졸업생 8명 가운데 4명은 동대문상고에 3명은 휘문고에 입학시켰어. 그 때야말로 진학과 취업이 선수와 학부모들의 가장 큰 희망이었잖아.  그래서 친분 있는 야구인들을 동원해서 최대한 힘을 기울였지.  그리고 1968년 군산상고와 군산남중에 야구부를 창단했어.  그때 심정은 구름을 탄 기분이랄까.(웃음)  당시 김병문 교장과 상의 끝에 건물 한 동을 지어 한쪽은 매점 겸 식당으로 쓰고, 한쪽은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 합숙소로 사용하게 했지.  쌀은 우리 회사 직영 정미소에서 몇 가마든 필요한 대로 보내줬어.  부식비는 매점에서 나오는 이익으로 충당했지.  그때는 운동장을 찾아가 어린 선수들이 연습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이었어."

 

김병문 교장은 매사에 의욕적이었고, 정이 많아 선수들을 자식처럼 돌봐줬다고 한다.  아침을 거르고 운동장 한편에서 비실대는 양기탁(72년 황금사자기 결승 9회 말 동점 타자) 선수를 발견하고 뒷바라지해준 사연은 감동을 자아낸다.  또한, 야구장으로 사용하기에 비좁은 운동장을 '동창 한 명이 운동장 한 평 보태기 운동'을 펼쳐 3700평을 넓힌 주인공이기도 하다.  이용일 사장이 거금(2000만 원)을 쾌척했다는 소식과 함께 군산남중·상고 야구부에 대한 평판이 좋아지자 서울로 진학했던 군산중 졸업생 가운데 두 명이 다시 내려온다.  정읍에서 노석현, 전주에서 나창기·김준환 등이 군산상고에 입학한다.  프로야구 원년 홈런왕 김봉연도 전주 북중에서 군산 남중으로 전학하는 등 우수한 유망주들이 모여들었다.  김일권·송상복(스마일피처) 선수도 군산남중 창단 멤버. 

 

 


 

최관수 감독은 통솔력이 뛰어난 진정한 지도자

군산상고 초대 감독 최동현은 이듬해 여름 도저히 못 하겠다며 전주 출신 서창활을 2대 감독으로 추천하고, 감독직을 내려놓는다.  두 감독은 2년 동안 토대를 닦으면서 열과 성을 다했다. 선수들의 기량도 향상됐다.  그러나 한계가 있었다.  이용일은 선수들이 지방 출신 감독을 신뢰하지 못하는 기미를 보이자 새로운 지도자를 스카우트하기로 마음을 정한다.  “1970년께 됐을 거야.  그때는 실업야구가 열서너 개 있었는데, 감독들이 나에게 신세를 졌거나 친한 사람들이어서 서울로 올라가 유망한 코치를 추천해달라고 부탁했지.  며칠이 지났는데 대한 야구협회전무 김정환이 전화를 해왔어.  '야, 기업은행 최관수가 은퇴한단다, 마산상고에서 데려갈 모양인데 어떻게 할 거냐?'라고 묻더군.  동산고 시절(1962) 유일하게 국가대표로 발탁됐고, 이영민 타격상도 받은 야구 천재여서 '좋다, 잡아라!'라고 했지.

이튿날 서울로 올라가 최관수를 만났어.  군산이 지방 도시여서 응낙할지 은근히 걱정됐는데 본점에서 허락만 하면 내려오겠다고 하더군.  그길로 서울대 상대 선배 정우창 행장을 찾아가 '군산에서 고무신 장사(경성고무) 하면서 학생 야구를 키우고 있는데, 유능한 지도자가 필요하니 최관수를 보내달라'고 간청했지.  정 선배는 흔쾌히 도와주겠다고 약속하더니 그해 7월 발령을 내더라고.  직책은 기업은행 군산지점 행원. 월급은 은행에서 받고, 출근은 군산상고 운동장으로 하게 됐지.(웃음)"

 

'호사다마'라고나 할까.  최관수 감독 부임 이틀 전(7월 18일) 경성고무에 화재가 발생, 공장이 잿더미가 됐다.  시민과 초중고 학생들은 경성고무 돕기에 나섰고, 각계에서 화재의연금이 들어왔다.  화재보험도 받게 돼 빠른 복구가 가능했다.  그럼에도 이용일이 재정적으로 어려움에 빠질 것이라는 소문이 야구인들 사이에 나돌았다.  최 감독에게 다시 생각해보라며 만류하는 야구인도 있었다.  그러나 최관수는 형편이 어려워졌다고 약속을 어길 수 없다며 화재 1주일 후인 7월 25일 군산으로 내려와 감독으로 부임한다.  "신의를 지키는 최 감독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환영 파티를 열어주고 한국합판, 백화양조, 호남제분 등 크고 작은 기업체와 지인들을 찾아다니며 협조를 부탁했지.  최관수 행원이 권유하는 형식으로 예금을 올려달라고 말이야. 반응이 예상외로 좋아 힘이 나더군.  예금권유 실적 전국 1위 행원으로 본점에서 표창을 몇 차례 받으니까 평소 과묵했던 관수도 신이 난거지.  그뿐 아니야. 운동장에 나가보면 선수들 눈빛부터 달라. 몸놀림도 바뀌고 말이야.  그런데 하루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어.  추석날 선수들이 시내에서 술 마시고 패싸움을 벌였다는 거야. 경찰도 다녀가고, 사태가 심각해지자 최 감독이 모든 일은 감독에게 맡겨달라고 간청한 뒤 이튿날 선수들을 교실로 불러 야구 배트를 하나씩 주면서 '모두 내 잘못이니 내가 벌을 받겠다'면서 엎드렸다는 거야.  누가 감히 스승에게 매질할 수 있겠어.  그러자 '너희가 때리지 않으면 나는 이곳을 떠나겠다'며 호통치니까 선수들이 펑펑 울면서 때렸고, 교실이 울음바다가 됐다는 거야..."

 

 


 

이용일은 "최관수 감독은 치밀하고 통솔력이 뛰어난 진정한 지도자였다"고 회고하며 "관수가 있었기에 군산상고가 명문이 됐고, 역전의 명수가 됐다"고 덧붙인다.  그랬다.  비가 온 뒤 땅이 굳는다고 했듯, 그 사건이 있은 후 사제간 정은 더욱 깊어지고, 야구부는 정상을 향해 하나로 똘똘 뭉쳤다.  그해(1971) 10월에는 제52회 전국체전에서 우승의 영광을 안았다. 1972년 황금사자기 대회 때도 결승 9회 말에 대역전극을 펼치며 우승, '역전의 명수'로 거듭나면서 전국 고교야구 강자로 자리를 굳힌다.  "군산상고는 제2의 모교"라며 "선수 생활은 7년밖에 안 했지만, 평생을 야구와 함께 멋지게 살아온 것 같다"며 껄껄 웃는 이용일 전 KBO 총재대행. 그는 팔순을 넘겼음에도 목소리는 40대 못잖은 열정이 넘쳐났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는지 근황을 묻자 "서울대학교에 '코치 아카데미'를 개설했는데, 이곳저곳에서 강의 요청이 들어와 바쁘게 지내고 있다"며 대화 흐름을 프로야구로 돌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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