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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앙기가 없던 시절에는 모심는 날 들녘이 울긋불긋 했어요!”
글 : 조종안(시민기자) / chongani@hitel.net
2013.06.01 16:18:35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지난 5월 21일(화)은 여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만물이 생장하여 온 누리에 가득 찬다는 소만(小滿).  소만은 24계절 중 여덟 번째 절기로, 선조들은 내남없이 양식이 떨어져 끼니를 힘겹게 연명하던 시기라 해서 ‘보릿고개’라 했다.  올해는 '부부의 날'과 겹쳐 의미가 달리 느껴진다.  우리네 부부 사이에도 금슬이 생장하여 웃음과 건강이 넘치는 가정이 이뤄지기를 빌어본다.

 

“사월이라 맹하(孟夏) 되니 입하·소만 절기로다/ 비 온 끝에 볕이 나니 일기도 청화하다/ 떡깔잎 퍼질 때에 뻐꾹새 자주 울고/ 보리이삭 패어 나니 꾀꼬리 소리한다/ 농사도 한창이요 잠농(누에농사)도 방장이라/ 남녀노소 골몰하여 집에 있을 틈이 없어/ 적막한 사립문을 녹음에 닫았도다···.” (조선 헌종 때 문인 정학유의 <농가월령가> 4월령 시작 부분) 

 

정학유(1786∼1855)는 조선 시대 실학파의 대학자인 정약용의 둘째 아들이다.  그가 농사를 직접 지으면서 농군이 실천할 사항을 달마다 읊고, 또 철마다 다가오는 풍습과 지켜야 할 예의범절 등을 14단락으로 나눠 엮은 <농가월령가>는 교훈적이고 서경적이며 흥취가 절로 느껴진다.

 

 

 

70대 노인도 중년으로 통하는 나포면 강정마을 작은 멀 풍경

군산에서 동북쪽으로 50여 리 떨어져 있는 아담한 농촌마을을 찾았다.  행정구역상 주소는 전북 군산시 나포면 옥곤리 강정마을. 강정마을도 큰 멀과 작은 멀로 나뉜다.  기자가 찾아간 곳은 작은 멀.  망해산(230m) 새끼봉우리들이 어깨동무하듯 마을을 감싸고, 앞으로는 주민들의 식량창고인 십자들녘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주민이라야 고작 20명 남짓.  100년이 넘는 고가(古家)에서 최근에 지은 전원주택까지 열서너 채가 고즈넉한 촌락을 이루고 있다.  마을 동쪽에는 강정저수지(강정제)가 있어 농사짓기에 아주 적합하며 강태공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부근에는 배들이 드나들던 나포 나루가 있고, 뒷산(봉화산)에 오르면 은빛으로 반짝이는 금강호와 충남 서천군 화양면·한산면이 한눈에 들어와 그 풍광이 감탄을 자아낸다.

 

마을에서 아기 우는 소리가 끊어진 지 오래됐고, 30~40대는커녕 50대도 만나볼 수가 없다.  그야말로 노인들만 오무레 오무레 모여 사는 도시 속의 벽촌이다.  젊은이들은 모두 떠났지만, 주민 모두가 건강해서 밭농사와 논농사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  9년 전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타지에 사는 딸들과 나눠 먹는 재미로 밭농사를 짓고 있다는 최 할머니(83) 푸념을 들어본다. 

 

“신랑 얼굴도 몰로고 스물두 살에 시집와서 농사만 지으면서 살았응게 오래 되얐쥬.  시장에 내다 팔 것은 없고 자식들이랑 나눠 먹는 재미로 이것도 심고 저것도 심고 그라쥬, 작년에도 참깨를 두 말쯤 거둬서 딸들에게 보내줬쥬.  집에 일이 생기믄 갸들이 와서 봐주니께··. 품삯일도 나가고 싶지만, 허리가 땅에 닿는 노인을 불러주는 사람도 없고···. 노령 연금이 쪼꼼(9만 6000원) 나오지만, 쌀값이 싸니께 먹고 사는 디는 걱정 없어유···.”

 

 

 

이웃이면서도 주말마다 기다리고, 하루에 전화를 열 번도 더하는 사람들 

최 할머니를 뒤로하고 몇 년 전 이곳에 터를 잡은 군산대 김동익(55) 교수를 만났다.  주말에 한 번씩 들른다는 그는 “서울에 계시는 부모님을 모시려고 몇 년 전 지인의 소개로 집을 사들였는데 그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더라”며 한숨을 내쉰다.  작년에 아버지가 병환으로 입원했고, 어머니는 수발하느라 꼼짝도 못한다는 것. 뒷산의 산비둘기 울음소리가 김 교수를 향한 ‘위로의 노래’처럼 느껴진다.

 

조금 있으니까 강정마을 터줏대감 여운달(67), 이병곤(70)씨가 김 교수를 향해 “기다리고 기다리던 막걸리 친구 오셨네!”라고 반색하며 마당으로 들어선다.  이어 막걸리상이 차려진다.  밀짚모자를 눌러쓴 여씨는 자리에 앉기 무섭게 “지난 주말에 눈이 빠지도록 기다렸는디 무슨 일 때문에 오지 않았느냐!”며 타박을 늘어놓는다.  그의 타박에서 순수한 인정과 우정이 동시에 묻어난다. 

 

세 사람은 마을에서 ‘삼총사’로 알려진다.  막걸리를 마실 때는 물론, 밭일할 때도, 논일할 때도 셋이 모여서 함께 나가기 때문이다.  여씨는 “20~30대 신혼가정이 없는 우리 마을에서는 50~60대는 청년, 70대는 중년으로 통하고, 여든 살이 넘어야 노인으로 쳐준다”며 허허롭게 웃었다.  황토물이 진하게 배인 그의 거친 피부가 ‘건강 보증서’처럼 느껴진다. 

  

예는 정에서 나오고 정은 가까이서 나온다고, 여씨와 이씨는 이웃에 살면서도 하루에 전화를 열 번도 더하는 사이란다.  아침 인사를 시작으로 점심 반찬은 텃밭의 상추인지 된장찌개인지 확인하고, 막걸리가 생각나거나 뒷산으로 고사리를 캐러 갈 때도 전화를 해서 함께 가기 때문.  두 사람은 올해 고추농사도 품앗이했는데, 여씨는 1250포기, 이씨는 350포기 심었다고 귀띔한다. 

 

이씨는 주말부부, 그는 “아내가 손자들 봐주러 몇 년 전부터 서울에 올라가 있기 때문에 일주일이나 보름에 한 번 정도 만난다”며 씁쓸해 했다.  여씨도 마찬가지.  부인이 날마다 일을 나간다고 했다.  이씨는 “지척에 살면서도 전화를 자주 하고, 주말마다 김교수를 기다리는 것도 외로움 때문 아니겠느냐”며 환하게 웃는다.  두 사람은 잠시 고향을 떠나 있기도 했지만, 이제부터는 고향을 지키는 파수꾼이 되겠다고 입을 모은다. 

 

 

 

“이앙기가 없던 시절, 모심는 날은 동네 잔칫날이었죠!”

예로부터 소만이 지나면 뻐꾹새 울음소리가 마을 앞·뒷산에 메아리치고 들녘에서는 밀보리가 누렇게 익어간다고 했다.  옛 농부들은 이처럼 보리가 익어가는 것을 두고 보리 누름이 만리(萬里)에 퍼지라고 노래했다.  본격적인 농번기로, 보릿가을(보리가 익어서 거둘 만하여진 때)과 모내기가 한꺼번에 밀어닥쳐 가능하면 ‘부지깽이 힘까지도 빌리고 싶다’고 했다. 

 

“맞아요. 옛날에는 이때쯤 되면 짙은 녹음으로 산천초목이 푸르고, 모를 못자리에서 논으로 옮겨 심는 모내기가 시작됐죠.  지금이야 이앙기가 대신하지만, 손으로 일일이 심어야 했던 시절에는 사람이 많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모심는 날에는 넓은 들녘이 사람으로 가득했고, 부잣집 잔칫날 앞마당처럼 울긋불긋했어요.  머리에 흰 수건을 쓴 아주머니가 다라이(함지박)에 새참을 내오다가 미끄러져 물이 흥건한 논에 빠지기도 했고···” 

 

“저는 우리 엄니(어머니)가 새참을 내오다가 논에 빠져도 신이 났어요.  어른들이 남긴 밥과 맛있는 반찬을 배부르게 먹을 수 있기 때문이었죠.  그래서 모심는 날은 산에서 병정놀이를 하다가도 때가 되면 논으로 줄지어 내려왔습니다.  그렇게 되면 논둑에서 동네잔치가 벌어지는 거죠.  누가 뭐라고 하는 사람도 없고, 얼마나 맛있게 먹었는지 지금도 입에서 침이 넘어가네요.”  

 

여씨 집을 구경하기로 했다.  여씨가 사는 집으로 향하는 오르막길은 만개한 철쭉과 영산홍이 눈을 즐겁게 해준다.  그의 집은 흙벽과 나무기둥으로 된 전형적인 시골집, 굽은 기둥이 집의 나이를 말해주는 듯하다.  살아계시면 망백(望百)이 지났을 여씨 아버지가 태어난 집으로 족히 100년은 넘었을 거란다.  풍상의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져가지만, 터만큼은 장군이 태어난 명당이라는 것.  여씨는 담 밑에서 단수수대 꺾어 먹던 시절이 그립다며 잠시 추억에 잠겼다. 

 

“혼자 농사짓고 살지만 외롭거나 부러울 게 없어···” 

 

집을 돌아보고 내려오다가 삐딱하게 기운 언덕 밭고랑에서 허리를 숙이고 흙을 골라주는 여씨 할머니(91)를 발견했다.  자식들은 모두 도회지로 나가고 혼자 고향을 지키는 여씨 할머니는 여운달씨 고모라고 했다.  일흔두 살에 혼자되어 꼬부랑 할머니가 되도록 농사만 지으면서 살았다는 여 할머니의 생활이 궁금했다.

 

“젊어서는 이쁘다는 소리 들었는디 늙은 게 이렇게 생겼네.  서로 데려갈라고 혔는데, 복이 없으니께 성질이 개떡 같은 사람(신랑)을 만나드라고. 그래도 어떻게 혀, 살아야지.(웃음) 신랑복은 없어도 일복은 타고났는지 신랑은 농사짓고, 나는 새새로 간장이랑 된장이랑 만들어 군산에 내다 팔아 살림에 보탰지.  그래도 큰 고생은 안 하고 살었어.  이렇게 혼자 농사짓고 살어도 부러울 것은 없어.  심심하지도 않고··.  군산에는 언제 나가냐고?  맛있는 반찬이 생각나믄 나가지.  그라녀도 며칠 있다가 도다리 한 마리 사러 나갈 참여.  도다리를 토막 내 고치장 진허게 풀어서 찌개 끓이면 얼큰한 맛이 사람 잡거든···.”

 

흙을 벗 삼아 지내면서도 부러울 게 없다는 여씨 할머니.  그는 망백임에도 목소리가 차분하고 맑았다. 상냥한 어투와 서글서글한 인상은 상대를 편하게 해주었다.  발음은 다소 느리지만, 언변에 조리가 있고 기품이 넘쳐 어느 사극드라마의 안방마님이 떠오르기도.  황토가 덕지덕지 묻은 주름진 손에서는 삶의 연륜과 함께 전라도 아낙의 얌전한 손맛이 느껴졌다.  밭에서 내려오는데 푸르기만 했던 하늘은 어느새 노을을 준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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