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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에서 형상으로 낭만을 꿈꾼다
글 : 서진옥(문화평론가) / seoball@lycos.co.kr
2013.02.01 11:50:00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가난한 런던의 이발사의 아들로 태어난 터너는 어린 시절부터 학교는 다니지 않고 아버지의 이발소에서 손님들의 초상을 그렸다고 한다.  12살에 수채화 한 점을 팔았고 15살에는 왕립 아카데미에 그림을 전시할 수 이었다.  그의 조용하고 친근한 시골 풍경화는 곧 대중에게는 크게 인기를 끌었고 큰돈도 벌 수 있었다.  그러나 유럽 대륙을 여행한 직후 야생적인 자연모습에 마음이 이끌린 그는 자신만의 독특한 풍경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보는 이에게 외경심을 불러일으키는 풍경으로서 조용한 시골 풍경대신 알프스 산맥의 봉우리나 불타는 석양, 자연에 도전하는 인간의 투쟁 장면 등을  담은 것이다.

 

터너의 스타일은 감성에 호소하는 색채에 의존하게 되면서 점차 추상적으로 변해갔다.  이 시대의 가장 위대한 색채 화가였던 터너는 갈색이나 담황색 애벌칠 대신에 하얀색 바탕을 사용함으로써 최종적인 완성작을 보다 환하게 보이게 한 최초의 화가이다.  그는 어두운 색은 하얀색과 섞어서 보다 밝게 만들고 노란색 같은 밝은 색깔은 광도를 높이기 위해 희석하지 않고 사용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터너의 그림 속에는 태양을 갖다 놓은 것 같다고 말한다.

 

거의 추상화에 가까운 작품을 그리게 된 노년기의 터너는 사람들 앞에서 그림을 그리고 제목을 붙여 대중들이 그의 작품을 보다 이해하기 쉽도록 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그의 작품들은 미완성작으로 간주되었고 그림들 간에 구분이 불가능하다는 비난을 받았다.  어떤 비평가들은 “터너는 시적인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난해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색채의 역할을 재평가한 그의 작품은 후대의 미술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터너는 회화 매체로 표현할 수 있는 극단을 실험한 화가라고 할 수 있다.  그의 후기 작품들은 그림자체가 주체가 주제라는 점에서 모더니즘 회화의 하나로 분류할 수 있을 것 이다.

 

말년의 터너는 아는 사람들과 연락을 끊고 이름을 바꾸는 등의 은둔 생활을 하였다.  그는 아무리 비싼 값을 준다 해도 자신이 걸작이라 생각하는 작품은 팔지 않았으며 오직 이류작품이라 생각하는 작품만은 팔았다.  그의 유언은 “문을 열어라. 석양을 바라보며 죽고 싶다”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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