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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늦지 않았구나!” 그때가 마흔 살이었죠
글 : 배지영 / okbjy@hanmail.net
2016.09.01 15:45:18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아직 늦지 않았구나!” 그때가 마흔 살이었죠 

[예술가가 산다면 작은 도시도 빛난다 1] ‘대한민국 미술대전’ 문인화 대상 작가 김수나씨 

 

  

 

 

“제 30대는 통째로 날아갔어요. 아이들 기르고, 살림하고, 서예실에서 가르치는 게 다였어요. 큰애가 초등학교 4학년 정도 되니까 제 정체성을 고민했죠. 그림을 못 그리고 있는 게 괴로웠어요. 작품 세계로 나가는 것도 겁이 났고요. 한참을 더 고민하고 나서야 작품을 시작했어요. 힘들 때, 항상 글씨와 그림에서 위로 받고 길을 찾았으니까요.”

 

어린 수나는 사람들 앞에 서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자기표현도 못 했다. 몇 년간 했던 무용은 무대에서 독무를 맡게 되니까 그만뒀다. 사람들의 시선을 한눈에 받는 걸 못 견딜 것 같았다. 긴장감이 흐르는 교내 합창대회, 피아노 반주를 틀렸다. 어머니가 내심 전공으로 공부하기를 바라던 피아노는 공포감 때문에 계속 칠 자신이 없었다. 

 

그런 수나가 곁을 내준 건 서예였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미술시간에 서예를 접했다. 담임선생님이 붓으로 쓴 글씨를 그대로 따라 쓰는 체본. 잘 썼다. 서예를 했던 선생님 눈에 수나의 글씨는 예사롭지 않았다. 서예대회에 출품했다. 수나가 생애 처음으로 쓴 붓글씨는 최우수상을 받았다. 5학년 때는 담임선생님의 권유로 서예학원에 다녔다.

 

“글씨는 혼자서 쓰는 거잖아요. 말로 못 하는 걸 쓸 수도 있고, 좋은 시도 옮겨 적고요. 제가 중2 때 아버지가 병으로 돌아가셨는데, 사춘기랑 맞물렸어요. 반항하는 사춘기가 온 게 아니었어요. 내면으로만 파고들었어요. 말문을 닫고 지냈어요. 원래 말이 없었는데 더 그런 거예요. 그때 서예를 한 덕분에 많은 위로를 받았어요.” 

 

그녀는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서예를 했다. 학교에서는 특별활동 시간에 쓰고, 집에서는 어머니가 따로 마련해준 책상에서 밤마다 글씨를 썼다. 방학 때는 서예학원에 나가서 글씨를 썼다. 그녀가 고3 때, 원광대학교 미술대학에 서예학과가 생겼다. 우리나라 최초였다. 대학 진학 고민을 할 필요는 없었다. 분명한 목표가 있었으니까. 

 

1989년, 수나씨는 서예를 전공하는 대학생이 되었다. 원광대학교 서예학과에는 전국 곳곳에서 온 학생들이 있었다. 수나씨의 동기는 40명. 그녀처럼 고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대학에 온 학생은 13명, 서예학원을 운영하며 글씨를 쓰던 사회인 학생이 더 많았다. 수나씨는 학과 수업을 들으면서야 비로소 알았다. 서예는 글씨만 따라 쓰는 게 아니라는 것을. 

 

“사군자와 전각(나무, 돌, 금에 새긴 글자)도 서예의 범주에 들어간대요. 전에는 몰랐죠. 기록한 것들도 겉으로는 글씨일 뿐이지만 거기에는 역사와 철학이 담겨있어요. 고대에는 큰일을 앞두고 점을 치잖아요. 그 내용을 새긴 게 갑골문자예요. 그게 서예고요. 공부할 게 무궁무진해요. 저는 한글, 한문, 사군자, 전각, 그림 등을 배워나갔어요. 참 좋았어요.” 

 

1991년, 수나씨는 대한민국 미술대전에서 입선했다. 뛸 듯이 기뻤다. 졸업을 앞둔 친구들은 대학원에 진학하거나 중국으로 유학을 갔다. 그녀는 작품 활동을 계속 하고 싶었다. 책도 비싸고, 종이 값도 비싸니까 돈을 벌어야 했다. 어릴 때부터 살아온 집의 2층 옥상을 막아서 서예실을 열었다. 어머니는 특혜를 베풀었다. 월세를 안 받았다.  

 

대학원 다니고, 서예학원 운영하고, 작품 활동 하고. 20대의 수나씨는 결혼하면 삶이 달라질 줄 같았다. 안정적으로 공부하고 그림 그릴 줄 알았다. 웬걸! 결혼한 여자들은 할 일이 너무너무 많았다. 사는 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체감했다. 그래도 틈틈이 그림을 그려서 공모전에 냈다. 계속 떨어졌다. 아기 낳고는 그림을 아예 못 그렸다. 

 

“두 아이를 어느 정도 키우고 나니까 10년이 지나버렸어요. 혼자서 다시 공부하고 그려서 전주 소리문화의전당에서 하는 아트페어 부스전(작가 여러 명이 같이 전시)에 참여했어요.  2009년이었어요. 같이 전시하는 작가님들이 저보고 너무 젊다는 거예요. 그때 제가 마흔 살이었거든요. 재주도 있고 가능성도 많다면서 계속 하래요. 큰 용기를 얻었어요.  

 

공모전에 낼 작품을 준비해서 여러 번 도전했어요. 잘 안 됐어요. 그래도 연구하고 작품을 그렸어요. 2012년에는 군산시민문화회관에서 개인전도 열었고요. 개인전 도록이 나왔는데 눈물이 막 나는 거예요. 내 이름으로 나온 걸 보니까 다 이룬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거예요. 눈에 핏발이 서는데도 7-8개월간 잠을 못 자면서 준비한 거거든요.”  

 

작품은 절반 정도 팔렸다. 수나씨는 작품을 사간 사람들에게 예의를 다하고 싶었다. 작가로서 책임지기 위해서는 더 깊은 공부가 필요했다. 서울로 가야했다. 그러나 아이들이 커갈수록 돈이 더 들었다. 이리저리 따져 봐도 그림 사사 받으러 갈 형편은 아니었다. 배우고 싶다는 간절함은 돈 걱정을 제쳤다. 그녀는 우송헌 김영삼 선생님을 찾아갔다.  

 

2013년, 수나씨는 “너무 행복하다”는 말을 자주 했다. 서울 인사동에 있는 우송헌 선생님 작업실에 들어선 순간부터. 그림을 배우러 다니는 그 자체가 좋았다. 한주도 쉬지 않고 갔다. ‘메르스’라는 역병이 창궐할 때도, 눈비가 쏟아져도 갔다. 시름시름 앓다가도 서울 갈 날만 되면 몸이 멀쩡해졌다. 돈을 아끼느라고 일반좌석버스를 타고 다녔다. 

 

“20년간 혼자서 익힌 내 스타일을 버리고 새로 배우는 게 힘들었어요. 뜻대로 안 그려지니까 화장실에서 운 적도 있어요. 그래도 제가 조금씩 커 나가는 느낌이 있었죠. 2014년에는 국전(대한민국 미술대전)에서 특선을 했어요. 대학 때 입선하고, 20년도 더 지나서 받은 거예요. 2015년에는 입선했고요. 떨어지지 않고 매년 붙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했어요.”

 

올해 초, 우송헌 선생님은 수나씨에게 “600장만 그려보자”고 했다. 사실 수나씨는 답답할 만큼 많이 그린다. 남들이 100장 그리면 200장 그린다. 쉬는 날도 없이 몰아치듯 그렸다. 온전히 자신을 쏟아 부었다. 그녀가 그리는 문인화는 형태보다는 선이 중요한다. 그런데 뭔가 부족해보였다. 선생님은 예쁘게만 그리지 말라고 당부했다.  

 

수나씨는 책벌레. 그림을 그리기 위해 수 없이 책을 보고 연구한다. 우송헌 선생님은 “생각으로 그리지 말고 실물을 봐!”라고 한다. 수나씨는 자신의 서예실에 다니는 소묵회 회원들과 매화마을에 갔다. 책으로만 본 그림 속 매화는 필선이 처져 있다. 진짜 매화는 그렇지 않았다. 쭉쭉 뻗어나갔다. 잘린 가지에서 돋아나는 새싹에서도 힘이 느껴졌다. 

“선생님이 그린 매화를 보고 항상 멋있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매화마을에 가보니까 선생님의 그림 속 매화들이 있는 거예요. 희망이 느껴졌어요. 오래된 고목에서 피는 꽃도 좋았지만 끊어진 가지가 생명력 있게 휙 올라가는 게 인상 깊었어요. 이번 국전에 낸 작품은 그때 본 구도로 그렸어요. 800장 넘게 그려서 한 작품을 골라서 낸 거예요.”

 

국전은 분야별로 입선, 특선, 우수상, 최우수상, 대상이 있다. 수상자 명단에 들면, 특선 후보부터는 휘호를 하러 간다. 대작일 수도 있으니까 심사위원들 앞에서 다시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린다. 수나씨는 서울로 가서 휘호를 마치고 군산으로 돌아오는 고속버스를 탔다. 차 안에서 ‘대상 수상’이라는 문자를 받았다. 믿을 수가 없었다.

 

“나는 상복이 없어. 그저 붓을 잡는 게 좋으니까 끝까지 가자”며 초월했던 수나씨. 홍수에 둑이 무너지듯 마음이 허물어졌다. 눈물이 쏟아졌다. 서예실과 작업실을 수십 년 째 내주고 뒷바라지 해준 친정어머니한테 소식을 전했다. 의사이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에, 젊은 어머니는 꿋꿋했다. 타고난 음식 솜씨로 출장요리사가 되어 수나씨 남매를 키웠다.     

 

“아직도 서예 해? 그만 해. 돈도 못 벌고 전망도 없는데... 그만 해.” 

 

예전에 알고 지냈던 서예 선생님들은 수나씨에게 말한다. 그 많던 서예 학원들은 사라지고 두세 곳만 남아있다. 잊혀져가는 외로운 분야, 서예는 옛날에 갓 쓴 사람들이 즐겼다는 이미지로 남아있다. 은퇴한 사람들의 고상한 취미 정도로만 여겨진다. 그게 안타까운 수나씨는 9년간 동사무소 문화센터에서 강의한 적도 있다. 서예를 보급하고 싶었으니까.

 

“서예는 요즘 세대하고 안 맞기는 해요. 시간을 들여야 해요. 느림의 미학이죠. 먹을 갈면 맥박수가 차분해지거든요. 고민 같은 게 싹 없어지고 편안해 져요. 먹의 성질이 그래요. 빠져들게 만들어요. 먹이 잘 갈려서 하얀 화선지에다가 첫 획을 그었을 때, 사르르 번지는 느낌이 있거든요. 그때 흡수되는 번짐이 사람한테 푸근함을 준대요. 아이들 정서에 좋죠. 

 

근데 요새는 손으로 글씨를 잘 안 쓰니까, 아이들은 서예를 안 배우죠. 서예는 진짜 인성교육의 표본이에요. 좋은 글을 계속 쓰잖아요. 감성적으로, 인성적으로 여유가 생기거든요. 서예는 나이 들어서도 좋아요. 친구가 없어도 혼자 할 수 있죠. 소리가 안 나니까 새벽에도 할 수가 있고요. 손에 힘을 주고 붓을 잡거든요. 뇌경색이나 재활치료에도 좋아요.”  

 

수나씨는 저마다 자기 몫의 인생이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그녀 몫은 서예다. 자기표현을 할 줄 몰랐던 ‘어린 울보’는 서예를 통해서 마음을 다독이고 성장했다. 이 세상에는 수나씨 같은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있을 터. 그녀는 한 명이든 두 명이든, 그이들에게 서예의 세계를 가르치고, 그들에게는 인생을 배우고 싶다고 했다.   

 

인생은 달라지지 않았다. 20년 넘게 실패한 뒤에야 국전에서 대상을 받은 수나씨. 그러나 어느 날은 하루 종일 그려도 맘에 드는 그림이 안 나온다. 버린다. 어떤 사람은 “문인화는 금방 그리잖아”라면서 버릴 거면 달라고도 한다. 그 한 장에도 수십 년의 세월이 들어있다. 그냥 줄 수 없다. 대신 볼 기회는 있다. 올해 12월, 김수나 작가는 개인전을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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