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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를 낙관하니까 ‘칼퇴’합니다
글 : 배지영 / okbjy@hanmail.net
2016.09.01 15:42:43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미래를 낙관하니까 ‘칼퇴’합니다  

[지방소도시 청춘남녀 인터뷰 47] ICM 시각디자이너 김동섭·진현태

 

 


 

 

어린 아이들에게 시간은 천천히 흘러간다. 새벽에 출근해서 자정 넘어야 일이 끝나는 부모님을 둔 아이들에게 시간은 ‘슬로우 모션’ 기능만 있는 리모콘. 아무리 물리쳐도 불사신처럼 따라붙는 심심함만 있다. 현태와 그의 형은 달력을 찢어서 그림을 그렸다. 어느 날부터는 만화 캐릭터를 따라서 그렸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도 생활은 비슷했다. 

 

“중학교 때 미술 선생님이 우연히 제 낙서를 본 거예요. 학원은 한 번도 다녀본 적 없는데, 저보고 디자인고를 가라는 거예요. 그때까지 디자인은 몰랐죠. 그림만 혼자서 그린 거예요. 근데 대전 디자인고에서 장학금을 준다고 해요. 집안 형편이 어려우니까 거기로 갔죠. 버스 타고 등교하는 데만 2시간 걸리니까 날마다 새벽 6시에 집을 나섰어요.” 

 

고등학생이 된 현태는 여전히 책상에 낙서를 했다. 한 선생님은 현태의 책상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뒤통수를 툭 치며 잔소리 하는 대신에 “그림 잘 그린다”고 했다. 그 선생님은 학교 대표로 각종 디자인 대회에 나가는 ‘기능부원’의 존재를 알려주었다. 면접을 거쳐 기능부원이 된 현태는 갖가지 디자인을 해나갔다. 매일 밤 10시에 끝났다.

 

현태는 여러 공모전과 대회에서 성과를 내야 하는 그래픽 디자인 선수인 셈. 가장 큰 목적은 지방기능경기대회에 나가 3위 안에 들어서 전국기능경기대회에 나가는 것. 그는 2학년 때 장려상, 3학년 때는 은상을 탔다. 전국대회에 나가서는 장려상을 받았다. 덕분에 특기자 전형으로 국립 군산대학교 산업디자인학과에 진학했다. 2009년이었다.

 

그해 군산대 산업디자인학과의 특기자 전형 학생은 두 명이었다. 한 명은 현태, 다른 한 명은 동섭. 동섭은 충남 당진 외곽에서 자랐다. 마을과 외따로 떨어져 있는 주유소 집 아들. 초등학교 수업이 끝나면, 집 앞 논둑에서 팬티 차림으로 동생과 둘이서 개구리를 잡았다가 놔 주기를 반복했다. 겨울에는 주유소 뒷산에 올라가서 꿩을 잡았다. 

 

당진 시내로 나가는 버스의 배차 간격은 띄엄띄엄. 고등학생이 된 동섭은 오전 6시에 일어나서 학교 갈 준비를 했다. 전교생 100여 명인 중학교에 다닐 때에는 특별히 애쓰지 않아도 성적은 중간. 고등학교는 달랐다. 공부를 하는데도 등수는 한참 뒤에 있었다. 고민하던 동섭은 ‘커서 광고 일을 하면 재밌을 거야’ 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막연하게. 

 

“고등학교 2학년 때 짝꿍이 미술학원에 다녔어요. 걔가 ‘그림 그리면 광고 할 수 있어’ 그러는 거예요. 바로 학원에 따라갔어요. 데생부터 배우거든요. 선으로 형태나 명암을 표현하는 걸 하는데 내가 생각했던 게 아니었어요. 그래도 했죠. 미술 대회도 나가서 상도 받았고요. 그래서 군산대학교 산업디자인학과에 특기자 전형으로 오게 된 거예요.”    

 

1학년 새내기들. 동섭과 현태, 그리고 또 다른 친구 경호는 서로 얼굴만 봐도 재밌었다. 밤에 헤어지는 게 아쉬웠다. 누구도 “살림 합치자”고 하지 않았다. 어느 날, 동섭은 베개를 들고 현태의 자취방으로 갔다. 패스트푸드의 ‘세트메뉴’처럼 세 친구는 붙어 다녔다. 군대도 동반입대 하는 게 너무나 당연했다. 그러나 동섭은 스스로 배신자가 되었다.  

 

“현태랑 같이 동반입대 하기로 하고는 신검을 받으러 갔어요. 거기에 해병대 팸플릿이 있는 거예요. 해병대는 스타일이 다르잖아요. 머리를 자른 뒤통수 사진이 너무 멋있더라고요. 그래서 해병대 시험을 한 번 봤죠. 솔직히 될 줄은 몰랐거든요. 됐더라고요. 방학 하자마자 일주일 만에 입대했어요. 현태는 육군으로 가고요.” 

 

남자들은 제대하면, 군 미필 시절처럼 밤늦게까지 놀고는 해가 중천에 뜨도록 늦잠을 자지 못 한다. 식구들이 눈치를 주는 않아도 ‘밥만 축낸다’고 고민하는 경향이 있다. 현태씨도 부모님한테 신세를 지고 있다는 부담감을 가졌다. 전역하고 일주일 만에 일자리를 구했다. 당구장과 노래방을 거쳐서 하루 12시간씩 일하는 고기 뷔페에 자리를 잡았다. 1년간 일했다. 

 

해병대를 갔다 온 동섭씨도 바로 복학하지는 않았다. 대학 졸업하고 나서는 취직해서 사회인으로 살아갈 그의 미래. 그는 자기만의 시간을 갖고 싶었다. 진짜로 하고 싶은 일들을 찾아서 해보고 싶었다. 그러려면 돈이 필요했다. 도시로 나가서 알바를 구하면 생활비가 따로 든다. 집 근처에 있는 농장들은 늘 일손을 필요로 했다. 

 

“중국이랑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들하고 같이 농장에서 일했어요. 지게차 운전하고, 양배추를 몇 만 평에다가 심고요. 온 몸 마디마디가 저리더라고요. 근데 일하는 사람들이랑 말도 안 통해요. 생각한 것만큼 돈도 못 벌고요. 그래서 아버지의 주유소에서 일을 했어요. 혼자서 생각 많이 했죠. 디자인 공부를 진짜 열심히 해보자고요.”

 

동섭씨와 현태씨는 나란히 복학했다. 동섭씨는 권으뜸 교수의 편집디자인 수업을 들으면서 “이거다! 내가 하고 싶었던 거야”라고 확신을 가졌다. 인쇄와 출판을 하는 종이 디자인, 글자 디자인에 속하는 폰트 공부에 매달렸다. 현태씨는 캐릭터 디자인 상품에 관심을 키워갔다. 각 도시를 상징하는 캐릭터를 만들고 싶었다. 

 

2015년 9월, 대학 4학년이던 현태씨는 시각디자인 전문회사 'ICM'의 직원이 되었다. 기업이나 상점에 맞는 통합 이미지메이킹을 하는 회사는 그가 3학년 때부터 인턴으로 일하던 곳. 군산의 근대역사에 맞게 거리의 간판을 디자인 했던 회사에는 일거리가 많았다. 달마다 <매거진군산>이라는 인물잡지까지 만들고 있어서 새로운 디자이너가 필요했다.

 

“제가 동섭이한테 ‘우리 회사에 올 생각 없냐’고 물어봤어요. 편집 디자인이나 폰트(글자)에 관심이 많으니까요. 사장님한테도 이 친구 얘기를 했죠. 그래서 같이 일하게 된 거예요.”

 

두 친구는 오전 9시 반까지 회사에 출근한다. 오후 6시 반이 되면 무조건 ‘칼퇴’한다. 'ICM' 이진우 대표의 방침이란다. 이 대표는 서울에서 디자이너로 10여 년간 일했다. 야근을 밥 먹듯이 하고, 주말 근무도 필수였다. 그래서 항상 “내 회사를 차리면 이런 건 싹 없애야지"라고 결심했다고. 그는 디자이너들이 하는 일에도 참견하지 않고서 믿고 맡긴다. 

 

 

동섭씨와 현태씨(또 다른 디자이너 이주현씨까지 모두 세 명)는 이진우 대표가 제안한 ‘군산 상품’을 고민했다. 군산은 히로쓰 가옥에서 영화 <타짜>를 찍은 곳. 수많은 여행자들이 그 집에 온다. 그래서 이 청년 디자이너들은 ‘군산 화투’를 만들었다. 화투에 군산의 특산품, 근대문화, 일제에 저항한 역사를 담았다. 곧바로 상품이 되어서 팔리고 있다. 

 

디자인한 것들이 세상에 나가는 일은 뿌듯하다. 그러나 사람들은 저마다 미의 기준을 갖고 있다. 디자이너가 클라이언트의 요구를 수용해서 시안을 만들어도 “별론데요...”라고도 한다. 색깔을 바꾸라고, 글자 크기를 키우라고, 배치가 답답하다고 하는 요구를 다 들어줄 수 있을까. 디자인에도 규칙이 있어서 싹 무시하면 촌스러워지는데. 

 

“우리 회사는 매달 잡지를 낸다는 게 너무 좋아요. 이 도시를 대표하는 잡지를 만들면서 자부심을 느끼고 있어요. 배울 것도 많아요. 나중에 저는 독립해서 출판 일을 하고 싶으니까 요. 디자이너 세 명이 나눠서 편집 작업을 하거든요. 글이 제 때 들어와서 마감에 쫓기지 않고 인쇄소에 넘길 때는 진짜 좋죠! 큰일을 해낸 기분이에요.”

 

미래의 출판인인 동섭씨가 말했다. 그는 서울 가서 전시회를 볼 때면, 자신의 부족함을 느낀다. “나는 안 될지도 몰라” 깎아내리지는 않는다. 출판을 전문으로 배우는 학원도 다녔고, 같은 꿈을 가진 사람들과도 교류한다. 아예 몰랐던 것들을 배우는 과정이 기쁘다. 대학원도 가고, 유학도 가고 싶어서 퇴근하고 혼자 공부한다. 남의 글을 보는 눈도 키우면서.  

 

현태씨는 줄곧 아기자기한 캐릭터 디자인에 몰두해왔다. 그런 전시회가 있으면 찾아가서 보고 연구한다. 학교 공부에 대한 미련은 없다. 발로 뛰고 부딪히면서 실질적인 공부를 하는 지금이 좋다. 퇴근하고 나서는 각종 공모전에 도전하고 있다. ‘진현태’라는 이름이 하나의 브랜드가 되기를 바란다. 그렇게 성장해서 시각디자인 회사를 운영하고 싶다. 

 

디자이너들이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는 직장은 무척 드물다. 어떤 시각디자인과 교수는 자신이 가르친 학생들이 졸업할 때, “다른 일 해라”고 할 정도다. 동섭씨와 현태씨도 안다. 월세를 내고, 생활을 하고, 학자금 대출을 갚고 나면, 남는 게 많지 않다. 그래도 이 청년들은 학생 때부터 하고 싶었던 일을 재미있게 하고 있다. 미래를 낙관하면서.

 

나는 동섭씨와 현태씨에게 마지막 질문을 했다.  

 

“(인터뷰 하려면) 잘 모르니까 두 사람에 대해서 뭐라도 조사하거든요. 근데 왜 둘 다 ‘프사’에 여자 친구 사진을 올려놨어요?” 

 

스물일곱 살, 동섭씨와 현태씨는 동시에 말했다.  

 

“(웃음) 여자 친구가 지켜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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