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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개월 동안 버티면서 꼭 해보고 싶었던 말 ... “1시간은 기다리셔야 탈 수 있어요”
글 : 배지영(시민기자) / okbjy@hanmail.net
2015.06.01 11:09:00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5개월 동안 버티면서 꼭 해보고 싶었던 말 ... “1시간은 기다리셔야 탈 수 있어요”

지방소도시 청춘남녀 인터뷰㉖

‘시간여행 169’ 인력거 끄는 남자 서른다섯 살 박경훈

 

 

 

“나, 아기 아빠 된다!”

경훈씨는 총각, 스물아홉 살. 자랑하고 싶었다. 참을 수 없어서 친구들한테 문자를 보냈다. 그 날은 2010년 4월 1일. 모두들 만우절 장난이라고 생각했다. 그 중에 한 명만 “경훈아, 축하한다”고 했다. 임신 사실을 알게 된 여자 친구 부모님은 “이 결혼 반댈세” 하지 않았다. 경훈씨는 감격했다. 그는 한 쪽 눈이 안 보인다. 2009년 8월에 산재를 당했다.

 

군산 동고등학교를 졸업한 경훈씨는 익산대학교 전자공학과에 1년간 다녔다. 경기도 구리에서 포병으로 군복무를 했다. 제대하고는 군산으로 왔다. 자동차 유리와 오토바이 헬멧의 섬유재질을 만드는 회사에 다녔다. 알바로 6개월만 하려고 했는데 집안 사정이 어려워지면서 계속 다녔다. 1년 6개월쯤 일하니까 학교 공부에 대한 의미가 없어졌다. 자퇴서를 냈다.

 

“4조 3교대를 했어요. 비정규직이었죠. 엄청 열심히 했거든요. 형님들도 ‘경훈이 혼자서 두 사람 몫 한다’고 칭찬했어요. ‘너는 정규직 해야 된다’면서 티오(자리를 뜻하는 군대 용어)나오면 무조건 추천해 준다고 했죠. 잔업 해서 월급도 200만 원쯤 됐어요. 젊으니까, 안주하면 안 되는데 재밌더라고요. 햇수로 6년 다녔어요. 근데 2008년 7월에 회사가 부도났어요.”

 

경훈씨는 곧바로 통영에 본사가 있다는 어느 조선소의 교육생이 됐다. 군산에 조선소를 세우면 들어가서 일할 수 있도록 6개월간 교육 받았다. 하지만 그 회사는 군산 부지 매입에 실패했다. 교육생들은 “조선소 본사로 가면 기술도 많이 배울 수 있고, 정규직도 될 수 있어”라면서 통영으로 갔다. 경훈씨는 ‘정규직’이라는 말에 회의적이었다. 기대를 안 했다.

 

2008년 12월, 경훈씨는 목포로 갔다. 그 곳에도 조선소의 하청업체가 있었다. 배는 철판에 미리 스케치(마킹, 밑 작업)를 하고서 용접을 한다. 경훈씨는 마킹 작업을 했다. 그는 철판끼리 고정시키는 용접 작업 현장에 있었다. 펑! 커다란 핀이 튀었다. 순식간에 경훈씨 눈동자로 날아들었다. 경훈씨는 전남대 병원으로 이송됐다. 2009년 8월이었다.

 

“보호자 동의가 있어야 수술을 할 수 있대요. 부모님이 알면 마음 아파하실 것 같았어요. 그래서 형만 오라고 했어요. 광주까지 온 형이 제 상태를 보고는 바로 아버지한테 연락을 했어요. 그때까지도 저는 ‘수술하면 괜찮겠지’ 라고 생각했죠. 아버지가 와서는 무조건 서울에 있는 큰 병원으로 가자고 했어요. 서울에서 수술을 세 번이나 받았는데 잘 안 됐죠.”

 

경훈씨는 병원에서 3개월을 지냈다. 스물여덟 살, 한쪽 눈으로만 세상을 보고 살아야 한다.  그걸 받아들여야 했다. 가슴을 쥐어뜯으며 부인하지 않았다. 경훈씨는 퇴원해서도 3개월 동안은 집에서 요양했다. 2주에 한 번씩, 서울에 있는 병원에 갈 때만 외출했다. 막상 사람들과 눈 마주치는 게 두려웠다. 꿋꿋하게 나서려고 해도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다.


경훈씨에게는 여자 친구 새미씨가 있었다. 병원에 있을 때도, 요양할 때도, 항상 곁에 있어줬다. 그는 외출할 때면 안대를 차고 다녔다. 식구들 앞에서도 잘 풀지 않았다. 그러나 세미씨 앞에서는 다친 눈동자를 고스란히 보여줄 수 있었다. 2010년 봄, 경훈씨는 병원에서 의안을 할 수 있는지를 검사했다. 가능하다는 진단이 나왔다. 

 

“의안을 하니까 정말 좋더라고요. 자신감도 많이 생기고요. 콘택트렌즈처럼 눈동자를 끼는 거예요. 생각보다 더 자연스럽더라고요. 의안한 날, 여자 친구랑 강원도 여행을 갔어요. 차도 없었으니까 버스 타고 갔죠. 다 좋았어요. 원래 산재사고가 나면, 회사에서도 위로금을 줘요. 제가 다니던 회사는 부도가 나서 아무 것도 없었죠. 그것도 잊을 만큼 좋았어요.”

 

2010년 8월, 경훈씨와 새미씨는 결혼했다. 11월에는 딸 서인이도 태어났다. 경훈씨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였다. 새미씨는 교대근무를 하는 간호사, 아내 몫까지 하겠다는 마음가짐으로 딸을 돌보았다. 씻기고, 재우고, 먹이고, 놀아주었다. 해도 해도 끝이 안 보이는 집안 일로 싸운 적도 없다. 그렇게 6년, 경훈씨는 계약직으로만 몇 군데 회사에 다녔다.   

 

 

“형, 이건 진짜 아니야. 군산에서 무슨 인력거를 하냐고? 군산에 무슨 관광객이 와?”

 

지난 해 여름, 군산 토박이인 경훈씨는 친한 형한테 말했다. 그는 ‘근대역사박물관’도 ‘히로쓰 가옥’도, ‘동국사’도 몰랐다. 구시가 쪽은 가본 적도 없었다. 인력거 얘기를 꺼낸 그 형은 “시간 되면 밥 먹자”며 경훈씨를 영화동(구시가)으로 불러냈다. 히햐! 경훈씨는 놀라자빠질 지경이었다. 그곳은 신세계, 여행 온 사람들이 걸어 다니고 있었다. 바글바글했다.    

 

‘시간여행 169’. 군산의 근대문화를 주제로 한 인력거 투어. 경훈씨는 친한 형의 소개로 인력거 회사를 준비하는 정철우 대표를 알았다. 곳곳에 근대문화가 있는 군산 구시가는 평지, 인력거 몰기에는 최적화된 장소라는 걸 알아갔다. 군산의 역사를 공부하고, 군산을 배경으로 한 <한국기행>도 찾아봤다. 내레이터가 해주는 해설이 가슴에 와 닿았다.

 

정철우 대표와 경훈씨 뿐인 회사. 평일에는 ‘강제 휴업’에 가깝다. 여행자들이 오는 주말, 인력거 알바 하는 청년들은 소중한 존재였다. 경훈씨는 평일에는 알바 교육을 했다. 이틀 동안 150kg 나가는 인력거를 혼자 끄는 연습을 시킨다. 그 다음에는 군산에 대한 공부를 함께 한다. 마지막에 손님 대하는 법과 인력거 코스를 직접 돌며 현장 교육을 한다. 
 
“저희가 작년 9월에 시작했거든요. 손님 태우고 가면, ‘어? 그거 어떻게 타요?’ 묻는 분들이 많았어요. 히로쓰 가옥에 가도, 같이 내려서 손님들 사진도 찍어주고 설명도 해 드려요. 여행 가이드에 가까운 거예요. 인력거를 타려는 사람들은 ‘이거 돈 드는데’ 생각을 덜 하죠. 보통 여행 간다고 하면, ‘돈을 쓴다’는 생각을 하니까요. 가장 큰 변수는 날씨였어요.”

 

한겨울, 걸어 다니는 것도 추운데 인력거를 타면 얼굴과 팔 다리에 파고드는 바람이 더 춥게 느껴진다. 인력거에 있는 담요를 덮어도 온기는 없다. 여행 오는 사람들도 줄었다. 인력거 회사 임직원은 총출동해서 사람들이 꼭 들르는 히로쓰 가옥과 초원 사진관 앞에서 대기했다. 한없이 기다렸다. 주말에도 몇 사람밖에 못 태웠다. 


겨울 내내 빙하기. 정철우 대표와 경훈씨는 아침마다 도전적으로 티타임을 가졌다. 날씨만 풀리면 잘 될 것 같았다. 그래서 기우제를 지내던 옛날 사람들의 마음으로 “봄바람아, 불어와라” 같은 주술적인 회의도 했다. “군산에 가면 인력거는 타 봐야지”라는 입소문이 돌게 페이스 북과 블로그를 방문해서 댓글을 달았다. 군산의 핵심 여행지에 배너광고도 달았다. 

 

아침저녁으로 불던 칼바람이 조금씩 누그러지는 날도 있는 2월, 하루에 한두 건씩 예약 전화가 왔다. 인력거를 타 본 사람들이 추천해주거나 배너광고를 보고 오는 전화였다. 그러나 여전히 ‘운빨’에 기댄 인력거 사업. 경훈씨와 정철우 대표는 폭우나 폭설이 내리지 않는 한,  인력거를 끌고 나갔다. 근대문화유산 거리에 서 있었다. 서로 의지하면서 봄을 기다렸다.  

 

“4월 말부터 좋아지기 시작했어요. 5월 초 연휴에는 안 쉬고 손님들을 태웠어요.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요. 현장에서 ‘지금 탈려고요’라는 손님들 전화를 받거든요. 예전에는 ‘5분 내로 갈게요’ 그랬어요. 빈 인력거로 다니다가 가는 거죠. 근데 드디어 ‘1시간 정도 기다리셔야 해요’라는 말이 나왔어요. 저희 인력거가 다 나와서 다니는데도 밀렸어요.”

 

 

어떤 손님은 인력거 모는 라이더를 지정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시간여행 169’ 에서는 라이더를 선택할 수 있는 시스템도 고민 중이다. “외모도 안 되고, 말주변도 없다”고 자평하는 경훈씨는 어르신들에게 ‘먹히는’ 스타일. 그는 추격전도 해 볼만 하다는 생각을 한다. 가족끼리 오면, 앞에 인력거는 일본 순사 옷을 입고, 뒤 따르는 사람들은 독립군을 하고.

 

일제강점기, 전차 타는 사람이 늘면서 인력거는 퇴물이 되었다.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에서 인력거꾼 김 첨지는 며칠째 손님을 못 태웠다. 이상하게 손님이 많아서 불길하던 날, 김 첨지는 죽은 아내 얼굴에 자기 얼굴을 부볐다. “설렁탕을 사다 놓았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 하며 울었다. 그건 어디까지나 소설. 경훈씨는 사랑받는 남편이자 아빠인 인력거 라이더다.
   
“몸 쓰는 일은 저랑 딱 맞아요. 회사 다닐 때도 재미를 느끼면서 성실하게 다녔죠. 근데 그건 제가 선택한 게 아니라 일해야 하니까 다닌 거예요. 인력거 일은, 제가 처음으로 선택해서 하는 거예요. 작년 9월에 시작했지만, 어떻게 보면 올해가 진짜 시작인 거죠. 절실하고 중요해요. 연구 해야죠. 올 겨울에는 인력거랑 같이 할 수 있는 아이템도 찾을 거예요.”

 

 

히로쓰 가옥 근처에는 ‘오성세탁소’가 있다. 그 주변에 모이는 동네 할머니들은 인력거 모는 청년들에게 “아이구, 내 새끼들”이라고 한다. 손님 태우고 가면, “그냥 자전거만 타도 힘든데 (인력거) 뒤에 뭐 할라고 타서 힘들게 해?” 라고 한다. 손님들 얼굴이 빨개진다. 경훈씨는 “손님들은 돈을 내고 타시는 거예요. 저희도 좋아서 하는 직업이고요”라고 말한다. 

 

처음 만났을 때, “제가 의안을 해서 눈을 잘 못 마주쳐요”라고 말한 경훈씨. 사장도 아닌데  인터뷰를 하는 게 의아하다면서 “저는 정말 평범하거든요” 라고 했다. 인터뷰는 약 2시간, 나는 점차 경훈씨 눈을 보며 질문할 수 있었다. 경훈씨도 시선을 피하지 않고 대답했다.  임대로 살던 집을 작년에 샀다고 할 때는 격한 축하도 해 주었다. 그러고나서 나는 물었다.


“(웃음) 인력거 회사 사장님은 왜 경훈씨를 스카우트 했을까요?”
“성실, 아닐까요? 제가 일하면서 욕먹은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성실이 제 무기예요.”

 

 

사람을 해치지 않는, 감동적인 무기를 가진 경훈씨. 인력거를 오래 몰고 싶다고 했다. 나는 경훈씨에게 베이징의 왕푸징 거리를 얘기했다. 수백 대의 인력거 모습이 장관이던 곳. 네 살이던 둘째 덕분에 날마다 인력거를 타며 보았던 중국의 옛 거리. 군산 구시가에도 옛 것은 많다. 오가는 인력거로 거리가 붐비면, 과거로 가는 여행도 더 풍성한 얘기를 갖게 되리.  

 

 

<시간여행 169>
정보 군산시 영화동 24-6
070-8281-16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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