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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선 개통 100년,
글 : 조종안(시민기자) / chongani@hitel.net
2015.02.01 15:58:01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옥구선(군산비행장선)

옥구선(11.8㎞)은 군산선 지선으로 군산~옥구 구간 철길을 말한다. 한국 전쟁(1950~1953) 중 미8군 군산 비행장 보급품 수송을 위해 부설된 군사용 철도이다. 1952년 5월 20일 유엔군에 의해 착공, 1953년 2월 25일 완공됐다. 초기 공식 명칭은 ‘군산 비행장선’이었으나 발음하기가 불편하다 하여 1955년 9월 1일 ‘옥구선’으로 개칭된다. 

 

‘미군 부대선’으로도 불리었던 옥구선은 주민의 요청으로 1955년 여객 열차(비둘기호)가 운행을 시작한다. 그해 8월 1일 상평역(1980년 12월 31일 폐역)이 무배치 간이역으로 업무를 개시한다. 1960년~1970년대에 군산역 플랫폼에는 군산발 열차가 처음 정착하는 역명이 새겨진 안내판 두 개가 마주 보며 서 있었다. 하나는 군산선 개정역이고, 하나는 옥구선 상평역이었다.  

 

1959년 2월 10일 자 옥구선 기차 시간표를 보면 군산역에서 06시 20분 첫차를 시작으로 12시 50분, 17시 45분 하루 3회 출발하고, 옥구역에 도착한 열차가 승객을 태워 돌아오는 식으로 하루 왕복 6회 운행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상평역에서 멈춘다고 하지만 11.8㎞밖에 안 되는 짧은 구간임에도 30~35분이나 소요되어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1960년대 중반부터 농촌 인구의 도시 집중화 현상으로 승객이 감소하면서 옥구선을 철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진다. 1965년 11월 내한한 세계은행(IBRD) 교통 조사단은 종합 보고서에서 옥구선을 비롯한 7개 노선은 적자 운영을 면하지 못하기 때문에 철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운행 횟수를 줄이면서 1980년대 후반까지 운행하다가 물자 수송 전용선으로 바뀐다.   

 

군산 미군 비행장에 보급품을 실어 나르던 옥구선은 2001년 이후 화물 열차 운행이 중단되고 폐선 상태에 가깝도록 방치돼 오다가 2011년 4월 1일부터 비정기적으로 화물 운송을 재개하고 있다. 

 

 


 

페이퍼 코리아선(경암선)

페이퍼 코리아선(아래 경암선)은 양지(洋紙) 원료와 생산품을 실어 나르기 위해 1944년 가설된 군산역~북선제지 군산공장(2.5㎞) 구간 철길을 말한다. ‘경암선’, ‘화전선’ 등으로도 불린다. 이 철길은 명칭도 북선제지선, 고려제지선, 세대제지선, 세풍제지선, 페이퍼코리아선 등 험한 세월의 굴곡만큼이나 자주 바뀌어 왔다. 

경암선은 개통 이후 1960년대 후반까지는 화물칸을 길게 연결한 증기 기관차가 하얀 연기를 토해내며 시속 10㎞~20㎞ 속도로 기적을 울리며 오갔다. 1970년대 이후에는 황색 줄무늬가 선명한 디젤 기관차가 다녔다. 경암선을 얘기하면 사람들은 대부분 철길 마을을 말한다. 그러나 주변을 꼼꼼히 들여다보면 수많은 사연과 애환이 서린 철도이다.

 

1966년 8월 어느 날. 일본 오사카(大阪)에 있는 모 화학회사가 고려제지(페이퍼코리아)에 홍보용 책자를 보내면서 주소를 한문 타자로 ‘한국현 군산시 구암동··’이라고 또박또박 찍어놓아 우편물을 받아본 직원들 얼굴이 붉어졌다 한다. 당시 홍석근 서무과장은 ‘한국현’을 ‘대한민국’으로 정정해줄 것을 요구하는 서한과 함께 반송했다는 씁쓸한 일화가 전해온다.   

 

경암선은 단선임에도 경포천과 구암천을 지나는 교량 2개와 건널목 11개, 게딱지같은 판잣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철길 마을’(약 1.1㎞) 등을 지난다. 기차는 안전 수단으로 경적을 수없이 울려대며 하루에 2~4회씩 오갔다. 이 철길의 특징은 1944년~2008년까지 64년을 제지 회사에서만 사용하는 진기록을 남겼다는 것이다. 

 

지금은 주택과 상가 건물이 답답할 정도로 빼곡히 들어섰지만, 1950년~1960년대만 해도 경암선 철길 주변은 전답으로 들녘이 펼쳐졌다. 논 사이로는 금강 지류인 경포천이 ‘S’자를 그리며 굽이굽이 흘렀다. 모심기철인 봄이면 농부가 소리가 흥겨웠고, 여름이면 마른 논에 물을 대느라 구슬땀을 흘리며 수차(무자위) 돌리는 농부들을 만날 수 있었다. 가을에는 추수를 하느라 탈곡기(호롱기) 소리가 요란했다. 

 

(구) 군산역에서 경암선을 따라 몇 걸음 떼면 왼쪽으로 일제가 설치한 화력 발전소 자리가 나온다. 해방 후에도 가동했던 것으로 전해지며 한국 전쟁 후에는 변전소로 이용했다. 한때 미군 비행장에서 나오는 폐지 분리수거장으로 사용되다가 1967년 백화 양조(훗날 베리나인)가 입주해서 소주 원료인 주정과 양주를 생산해 왔다. 당집이 있던 서래산이 감싸고 있어 주변이 음침했는데, 오랜 채석 작업으로 평지가 됐고 최근 고층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세월의 칼날에 할퀴고 뜯겨나간 침목을 하나둘 세다 보면 잡초에 가린 침목이 보인다. ‘꺼먹다리’, ‘댓교’ 등으로 불리던 경포천 교량이다. 개구쟁이들 수영장이었던 꺼먹다리 오른쪽에는 1927년 일제가 전국 최초로 공식 규격으로 조성한 경마장(해방되던 해 11월 폭발 사고로 사라짐)이, 왼쪽(군산 경찰서 자리)에는 송진공장이 있었다. 태평양 전쟁 말기 일제는 화약 원료인 송진을 구하려고 한반도 명산의 소나무들까지 마구잡이로 잘라냈으며 당시 학생들은 수업 대신 송진 채취 작업에 동원되었다.  

 

‘꺼먹다리’를 지나면 공동 우물과 미나리꽝이 있던 자리에서 철길이 또 갈라진다. 1960년대 중반 군산 화력 발전소(7만 5천㎾) 연료 수송을 위해 개설한 화전선(火電線)이다. 이 선로도 많은 얘깃거리를 담고 있다. 땅속으로 묻혀버린 철로가 세월의 무상함을 말하는 듯하다. 화전선은 1967년 3월 23일 화력발전소 광장에서 열린 금강대교 기공식 날 당시 박정희 대통령 일행이 탄 특별 기동차가 지나간 철도이기도 하다. 사연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당시 금강 대교 가설은 군산 시민의 가장 큰 소망이었다. 제 6대 대선에 출마한 박정희 대통령은 2천여 명의 시민과 학생들 앞에서 금강대교 필요성을 역설했고 참석자들은 박수로 화답했다. 기공식이 끝나기 무섭게 공사가 시작됐다. 한국 합판 작업장 옆에다 교각도 세운다. 그러나 5월 대선과 6월 총선이 공화당 압승으로 끝나자 공사가 중단되더니 1968년 예산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사업 자체가 백지화되는 황당한 국책 사업이 되고 만다. 지금은 화전 자리에 액화천연가스(LNG) 발전소가 들어서 있다.

 

 


 

문구점을 끼고 건널목을 건너면 60~70년대 도시 변두리 풍경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철길 마을이다. 세월의 풍상에 나약해진 판잣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그야말로 기찻길 옆 오막살이 동네다. 탈색된 시멘트벽에서도, 녹슨 자물쇠에서도, 빨랫줄 집게에서도 옹색함이 묻어난다. 이 부근은 일제 강점기 공업단지로 길 건너에 있던 붉은 벽돌담의 배달성냥 공장과 한국합판 자리에 들어선 현대식 대형 할인점과 비교되면서 애틋함이 더한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천년학」촬영지였던 경암동 철길마을은 한국전쟁(1950~1953) 후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이 황무지나 다름없는 이곳에 하나둘 터를 잡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형성됐다. 주변이 논밭이고 큰 공장도 많았으며 구암초등학교와 이웃하고 있어 자녀 교육은 물론 생활 여건도 좋았다. 따라서 법적으로 집이 들어설 수 없는 국유지임에도 건물이 마구 지어졌다. 그렇게 무허가 건물에 살면서도 주민들은 꼬박꼬박 세금을 낸다고 한다.

 

마을이면서도 마을 같지 않은, 그래서 3차원의 세계처럼 느껴지는 철길 마을은 영화 촬영지였고, 텔레비전 방송에도 몇 차례 소개됐으며 아마추어 사진작가들의 출사지로 주목을 받더니 이제는 명소가 됐다. 봄에 거닐면 농부들의 농부가 소리가 들려올 듯하고, 가을에 거닐면 급우들과 다양한 표정의 허수아비 아저씨들을 흉보며 논길을 걷던 초등학교 시절을 떠오르게 하는 마을이기도 하다. 

 

철길 마을이 끝나는 지점은 금강 연안 로터리. 그곳에서 신호등을 지나면 경암선 종착지 페이퍼 코리아 회사다. 짧은 교량이 놓인 구암천은 회사 울타리를 끼고 흐르면서 천연의 해자 역할을 톡톡히 해주고 있다. 철길 마을도 결국 일제 식민 통치가 남긴 생채기로 아픈 역사의 일부일 터다. 열차 운행은 중단됐지만, 군산시는 철길 마을 부근을 관광지로 조성하기 위해 코레일과 협의 중이라 한다. 기적을 울리며 숨 가쁘게 달릴 그날의 꼬마 열차가 눈앞에 그려진다. (철도 이야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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