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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耳順)의 딸이 쓴 사모곡 “묵각시의 노래”
글 : 오성렬 / poi3275@naver.com
2024.02.20 18:10:26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조귀년 시인 부부와 모친

 


이순(耳順)의 딸이 쓴 사모곡

묵각시의 노래

 

조귀녀 시인

글 오성렬(편집위원)

 

어머니의 한 맺힌 고향을 찾다.

1960년대 성산면 여방리에서 5남매 중 둘째 외동딸로 태어난 조귀녀(69)가 초등학교에 들어가 글을 익히자 일생을 까막눈으로 사셨던 어머니(박모순/93)는 공주군수에게 편지를 보내라 하셨다. 어린 시절의 흐릿한 기억으로 평생 자신의 고향을 공주로 알고 사셨던 터라 그곳의 박씨 문중을 뒤져 뿌리를 찾아야겠다는 한이 깊었기 때문이다. 조귀녀는 어머니를 모시고 여러 차례 공주를 다녔다. 하지만 어머니 기억 속 공주의 멋둔리라는 부락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어머니의 기억이 잘못된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막막함이 커져갔다.

 

그렇게 애를 태우던 중 멋둔리라는 지명이 공주 아닌 다른 지역에도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인터넷으로 충청도 일대를 검색하던 중 충북 보은에 비슷한 이름의 변둔리라는 부락이 눈에 들어왔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변둔리를 찾은 가족들은 그곳에서 기적처럼 어머니의 뿌리를 찾을 수 있었다. 어머니의 고향은 충남 공주가 아니라 충북 보은이었던 것이다. 변둔리의 옛 이름이 멋둔리라는 것도 그 때 알게 되었다. 엉뚱한 기억으로 영영 찾을 수 없을 것 같았던 고향을 참으로 우여곡절 끝에 찾은 것은 운명처럼 하늘이 도왔다고 밖에 설명할 길이 없었다. 어머니 생전 소원을 풀어드린 자녀들은 86년 만에 찾은 외가의 사촌들을 비롯한 뭇 가족들과 꿈에도 그리던 만남을 이어가면서 회포를 풀고 있다. 또한 새로 발견된 어머니의 호적에서 음력 45일이 생일이라는 것이 밝혀진 만큼 매년 이날은 양가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여 우애를 다지며 어머니의 무병장수를 축원드릴 생각이다.

 

묵각시의 노래

지난해 조귀녀 시인이 펴낸 묵각시의 노래는 농촌일이라면 못하는 것이 없었던 농사꾼 아버지와, 음식 솜씨가 좋고 특히 묵을 잘 쒀 묵각시라는 별명도 얻었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에다 자신의 삶의 애환을 진솔하게 담은 첫 시집(詩集)이다. 2018년 대학을 졸업하고 이듬해 계간지 서울인문에 시로 등단한 그녀는 평생대학 시낭송반 및 시민예술촌에서 진행하는 시문학 창작수업을 받으며 시작(詩作)활동을 해 오던 중 작년 630일 군산대 동문들과 지인들의 축하 속에 첫 시집 묵각시의 노래출판기념회를 가졌다. 사실 이 시집은 어머니의 고향을 찾기 이전에 쓴 것으로 이 책으로 어머니의 고향이라도 찾을 수 있다면 하는 일말의 기대감에서였는데 출간 직전 기적처럼 소망을 이루게 되었으니 그녀에게는 자신의 간절한 기도에 하늘이 응답한 시집이 된 셈이다.

 

조귀녀 시인은 어릴 적 몸이 약해 학교를 빠지는 날이 많았고 남아선호 사상이 심한데다가 어머니가 두 분이라는 유별난 가정환경에서 성장했다. 조부님은 글을 많이 배운 선비였으나 경제적으로 무능했고, 그 때문에 칠남매의 맏이인 부친은 어린 시절부터 대가족을 부양해야만 하는 고된 생활에 내몰렸다. 부친은 정규 교육은 받은 적 없으나 농사일에 전념하며 조부의 영향으로 한글은 물론 한자도 깨우쳐 시골에서는 나름 식자층으로 행세했는데 소를 팔아 당신의 동생을 대학에 보낼 정도로 형제애가 남달랐던 분이기도 했다.

 

문중 일에 헌신적이었던 부친은 불같은 성격에 잘못된 일은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을 만큼 정의로웠으며 인정 또한 많았던 분으로 다툼이 있는 자리에서는 상담사와 해결사 역할도 종종 함으로써 주위의 신망을 얻었다. 자녀들에게는 엄격했지만 때로는 함께 어울려 방에서 씨름도 하고 방패연과 나무 팽이도 만들어 주시는 솜씨 좋고 다정했던 분으로 특히 외동딸인 조귀녀를 많이 아껴주셨는데 단추 달고 양말 깁는 바느질까지 가르쳐 줄 정도로 다정다감한 면이 있었다.

 

반면에 여자와 그릇은 내돌리면 깨진다는 신조가 강했던 분이기도 해서 어린 시절 조귀녀로서는 동네 교회에 나다니는 것 외에는 일체의 외출이 허락되지 않았다. 또한 자신이 두 번 결혼한 것도 팔자 탓으로 여겨 사람의 운명에 대해 관심이 남달랐고 정초에는 책력과 역술 서적을 항상 곁에 두고 읽으며 이웃으로부터 자녀의 혼사나 이삿날 문의를 받고 길일을 정해 주는 일도 많았다.

 

어머니는 예닐곱 살 때 집을 잃은 고아로 어찌어찌 군산까지 흘러들어와 어느 부잣집에 들어가 성장하였다한다. 남의 집에 얹혀서 그 집의 육남매를 업어 키우며 고생하다가 6.25 전쟁 후 양가 어른들 이해관계의 희생양이 되어 이미 결혼 상태인 아버지와 혼인하게 된다. 양반집에서는 자식을 둔 며느리는 비록 온전치 못해도 내치는 게 아니라는 조부의 뜻에 따라 후환을 염려하지 않아도 될 고아로 자란 여자, 즉 조귀녀의 어머니를 둘째 부인으로 맞아들인 것인데 자신이 속아서 시집왔다는 피해의식으로 어머니는 반발하였고 폭력을 써서라도 어머니를 눌러야 했던 부친은 결혼생활에서 자주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부모의 다툼을 자주 목격했던 자녀들은 부친을 권위적이고 성질 급한 무서운 분으로 기억하기도 하는데 부친은 돌아가시기 몇 년 전 당신의 아내가 친정이 없다는 이유로 함부로 대한 사실이 있었노라고 고백하며 후회의 심정을 내비치기도 했다. 부친은 천성이 효자였던지라 무조건 조부님의 뜻에 따라 살아야만 했고, 평생을 논밭에 엎드려 살면서 일하기 싫으면 밥도 먹지 말라는 철학이 몸에 밴 분이었다.

 

끝없는 향학열, “공부에 늦은 나이란 없다

성산초등학교 시절, 당시엔 5학년 어린이들도 방과 후 과외수업을 받았는데 조귀녀는 그나마 그것도 받을 수 없게 되었다. 부친은 어려운 살림이었지만 대학까지 보내주겠다고 했다가 갑자기 오빠가 가출하는 바람에 충격을 받고 대학은 고사하고 중학교도 보낼 수 없다고 선포했기 때문이다. 부친의 이 청천벽력 같은 말은 그녀를 절망에 빠뜨렸다. 중학교 원서를 쓸 때는 울면서 사정도 해보았지만 부친은 요지부동이었다. 그 원망은 평생 조귀녀에게 돌이키기 힘든 상처가 되었다. 그러면서 배움에 대한 욕구는 가슴 한구석에 휴화산처럼 응어리로 남고 있었다.

 

나이 오십 중반에 접어들어 그녀는 공부에 대한 한을 풀고자 졸업증명서를 떼러 초등학교를 찾았다. 공무원인 남편의 쥐꼬리 월급으로 아이 낳아 기르고 부업으로 편물수예점을 운영하며 집을 장만하면서 자녀 대학 공부시키느라 정신없는 세월을 보내던 중 설상가상으로 시어머니에게 치매가 찾아왔다. 대소변을 못 가리는 시어머니의 병수발에 전념하고 있을 때 뜻밖에도 건강하시던 친정아버지가 세상을 떴다. 그 충격으로 조귀녀는 한동안 깊은 우울증을 앓았다. 오직 먹고사는 데 급급하다보니 친정 부모님을 돌아보지 못했다는 자책감으로 후회가 밀려왔다.

 

이런 힘든 시기를 겪고 있을 때 남동생의 한마디가 그녀를 다시 일어서게 했다. 이제 아이들도 다 장성했고 여유가 생겼으니 지금부터는 누나가 가장 해보고 싶은 일을 찾아 마음껏 도전해보라는 조언이었다. 그 조언이 그녀 인생의 터닝 포인트로 작용하게 되는데 성인이 되어서도 공부할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조차 몰랐던 그녀의 내재된 향학열에 불을 지펴 50대 중반의 나이에 늦깎이 공부에 나서도록 했기 때문이다.

 

조귀녀는 쉰다섯에 중학생이 되어 토요일은 물론 방학도 없이 4년을 보내며 고등학교까지 마치고 내친 김에 대학에 진학, 군산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만학의 이 학창시절은 그녀에게 녹록치 않은 고난의 시간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황홀한 시간이었다고 고백한다. 대학 1학년 때 남편의 암 수술로 1년 휴학 후 복학하기도 했는데 다시 대학에 다닌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 하늘이 준 축복으로 여겼다.

 


 

 

독서를 좋아했던 홍안의 문학소녀, 어언 이순의 뒤안길에 서다.

상급학교를 제때 정상적으로 진학하지는 못했지만 어릴 적부터 책을 많이 읽을 수 있었던 건 조귀녀에게 큰 행운이었다. 초등 6학년 무렵 회현으로 이사했는데 면사무소 근무하는 이웃 친척 오빠 집에는 책이 많아 농사일 틈틈이 많은 책을 가져다 읽을 수 있었다. 전깃불도 아껴야 해서 부모님 몰래 촛불을 켜고 읽은 적도 많았으며 그 시절 릴케와 유치환의 시를 즐겨 읽었고 춘원 이광수의 흙, 황순원의 소나기, 박종화의 금삼의 피에 매료되었던 기억이 새롭다.

 

외국 작가로는 셰익스피어, 헤밍웨이, 도스토예프스키, 모파상, 펄벅 등 위대한 문인들의 글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대학을 다니는 동안 읽은 황석영 작가의 수인은 남북통일을 염원하는 내용에 공감되어 작가에 대한 존경심이 일었고, 최명희의 혼불을 읽으면서는 공부를 많이 해야 작가가 될 수 있구나하는 것을 깨닫기도 했다. ‘글을 억지로 꾸며서는 쓰지 않겠다, 오직 진실 된 글만 쓰겠다한 박완서 작가를 특히 존경한다는 그녀, 이제 고희(古稀)를 눈앞에 두고 건강이 그리 좋은 편도 아니라서 앞으로 얼마만큼이나 글을 쓸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생의 마지막까지 해야 할 일이 글 쓰는 일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다. 젊은 시절 가난에 처해보기도 했고 살아오면서 절망의 순간들도 있었으니 삶과 글이 일치되는 솔직한 글, 죽어가는 생명을 다시 살리는 글 한 줄 남기고 죽을 수 있다면 글쟁이로서 여한이 없겠다 말하는 표정 속에서 지나온 삶에 대한 회한과 숙연함이 엿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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