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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나도 녹색어머니”, 이경희 전 중앙회장
글 : 이진우 /
2018.07.01 14:12:35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다시 태어나도 녹색어머니”, 이경희 전 중앙회장

- “내 몸에는 녹색피가 흐른다는 녹색 교주

- 아이들이 교통사고에서 해방되는 그날까지 봉사할 터

 


 

 

이경희 하면 떠오르는 건 녹색 교주라는 별명이다.

군산의 초등학생 자녀를 둔 엄마들 사이에선 뼛속까지 녹색인 억척 엄마이자 아이들을 안전하게 지켜주려는 수호신으로 꼽힌다.

군산에서 처음 활동을 시작하여 사단법인 녹색어머니회 중앙회장까지 역임한 이경희 회장. 봉사현장의 엄마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면서 녹색어머니회 라는 봉사단체를 국민들에게 널리 인식시키는데 디딤돌을 마련했다.

이경희 회장은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지만 딱 하나를 꼽으라면 당연히 녹색어머니회라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은 평생 녹색어머니로 살고 싶다고 강조한다.

전국 단위 조직의 봉사단체의 중앙회장을 역임한 경력답게 자신감이 넘쳐나고 당당한 모습이 돋보인다.

피까지 녹색일거라는 녹색교주 이경희 전 녹색어머니회 중앙회장을 만나보았다.

 


 

 

녹색어머니하면 이경희라는데?

 

녹색어머니를 알아주지도 않을 때 시장님을 만나서 예산을 지원받고, 교통행정과에 녹색어머니회 담당을 만들고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다 보니 군산 에서는 이경희 하면 녹색어머니, 녹색어머니 하면 이경희라는 공식이 생겼어요.

제 삶의 큰 족적이죠. 제가 처음 3~4년 할 때는 몰랐어요. 중앙회장을 하고서도. 그런데 지금 여기까지 살고 보니까 제 삶의 큰 중심이 내 자녀를 제외하고 녹색(어머니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여러 일을 하지만 명함 한 장 만들지 않았어요. 오래전부터 전북학교안전공제회 등기이사거든요. 33살부터 했으니까 상당한 기간이 지났죠. 학교폭력심의위원회가 전북에 처음 발족할 때 원래 2년에서 4년밖에 못하는 건데 7년 가까이 했어요. 원래 그렇게 오래 못하는 일이지요.

평통 활동을 하거나 그 외에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 위원을 하면서도 명함 한 줄 넣지 않았어요. 오로지 녹색어머니회만 명함에 새깁니다.

왜냐하면 제가 상징적이어야 하는데, 저 사람은 이것저것 다하는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기 싫어서요.

오로지 녹색어머니 회원으로서 인정받고 싶고 평가받고 싶었습니다.

 

녹색어머니회에 대해 설명해 달라.

 

녹색어머니회는 경찰청에 소속된, 학부모들로 구성된 단체입니다. 1969'자모 교통 지도반'으로 출범한 후 1971년 치안본부(현 경찰청에 해당) '녹색어머니회'로 명칭이 변경되었습니다.

2005년 전국 지방경찰청별로 녹색어머회를 구성(4,698개 초등학교 414,955명 참여)하여 다음해인 2006년 사단법인 녹색어머니회 중앙회를 창립하여 같은 해 2월 경찰청 비영리 민간단체로 등록하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지요. 현재 녹색어머니회는 시,,구 구별 아닌 경찰서 단위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자녀가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정회원이 될 수 없는 녹색어머니회. 그래서 선배와 후배가 함께 가고 선배의 발자취를 후배가 쫓아가는 녹색 오비팀 같은 녹우회를 만들어 운영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군산 녹색어머니회 간사 역할을 해주고 있어요. 후배들이 애쓰는 모습을 외면할 수 없어 제 자존심을 다 내려놓고 고문을 하면서, 또 간사 역할을 하면서 현역들하고 똑같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제가 전국을 돌며 소양교육 강의를 다니면서 받은 강의료에 더 돈을 보태고, 지인들에까지 도움을 받아 어려운 녹색분신들에게 재정적인 도움을 주려고 하고 있습니다.

 

처음 녹색어머니회에 참여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

 

제가 살던 아파트 옆 좁은 도로에서 초등학교로 오가는 아이들의 교통사고가 자주 났어요. “초등학교 아침 등교시간마다 자동차가 끽끽 급정거하는 소름 돋는 소리를 견디다 못해서 자녀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교통봉사 하는 것이 뭐냐고 주변사람들에게 물어봤더니 그게 바로 녹색어머니회라고 하더라고요.”

여기저기 수소문 끝에 등하굣길 횡단보도에서 차량을 통제함으로써 학생들의 교통안전을 확보하여 교통사고를 예방하는 활동을 하는 단체가 바로 녹색어머니회라는 것을 알았고 곧바로 관심을 가지게 됐다.

사람들은 대부분 빛이 나는 일에는 관심이 많지만 반짝 빛이 나지 않는 일에는 관심이 없는 게 요즘 세태잖아요.”

이 회장은 당시 자신이 생각하기에 이렇게 별로 빛이 나지 않는 일이었지만, ‘내가 꼭 해야만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 녹색어머니회에 참여하게 됐다.”고 했다.

 

어떤 마음으로 일했는가.

 

어릴 적에 동네에서 보면 혼자 학교에 가지 않고, 여러 명이 떼로 몰려서 가잖아요. 그중에 저보다 두 살 아래였는데 유난히 머리도 새까맣고 길고 예쁜 애가 있었어요. 내 친구의 동생이었는데 우리 집에 놀러오면 제가 연탄집게 가지고 아니면 젓가락을 불에 달궈서 머리도 해주고 미스코리아 나간다고 보자기 입혀서 워킹 연습을 시키곤 하면서 놀고 했어요.

그런데 그 아이가 도로에서 뛰어가다가 쌀을 싣고 다니던 농협트럭에 치어 다리를 크게 다치는 끔찍한 사고를 바로 앞에서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그 아이는 오랫동안 병원 치료를 받았으나 결국 다리가 몹시 불편한 처지가 되었어요.

그날 이후 교통사고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었고 녹색어머니회에 발을 담그면서부터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하는 계기가 되었지 않나 생각합니다.

녹색어머니회에 들어갔는데 제가 그냥 다른 사람하고 똑같이 활동하겠어요?^^

때로는 난폭한 운전자도 혼내기도 하고, 학교 측에 필요 장비도 요구하고 교사들 참여를 유도하고 제 스타일대로 열심히 하다 보니 결국 학부모들에게 떠밀려 제가 녹색어머니회 회장, 학부모회 회장을 6년 동안이나 맡기도 했습니다. 그런 과정이 중앙회장까지 하게 된 힘이 되었죠.

 

횡단보도 지키기 위주의 녹색어머니회 활동을 캠페인으로 전환

 

처음 녹색어머니회에 들어갈 당시 신풍초교로 가는 롯데2차 아파트와 주공3차 아파트 사이의 좁은 도로는 신호등이 없고 횡단보도 만 있었는데 당시에 사고가 많이 나는 곳 중의 하나였습니다. 신호등을 설치하려고 백방으로 뛰었지요.

그 때는 녹색어머회 활동이 활성화 되지 않았던 때였어요. 무조건 시청에 가서 민원을 내면 되는 줄 알았어요. 줄기차게 민원을 제기해서 결국에는 제가 녹색어머니회 군산연합회장을 하면서 신호등을 만들게 되었어요.

횡단보도에서 교통봉사를 시작할 당시엔 플라스틱 봉을 사용했는데, 초록불인데도 그냥 지나가다 운전자 차량에 부딪치면 부러지더라고요. 겨울에는 부러지고 여름에는 휘고, 그래서 참 시민의식이 문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운전하는 어른들만의 잘못이 아니지요. 차량이 우선인 신작로 시대부터 살았던 사람만의 차가 먼저다라는 의식! 이런 세태를 개선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고민 끝에 매주 화요캠페인을 만들어 시작하였습니다.

 


 

 

스쿨존 지키기에 남다른 힘을 쏟고 있다고 들었다.

 

제도를 만들어놓고 홍보하지 못한 건 정부의 책임이지요. 그렇다면 시민들에게 어린이 보호구역(스쿨존)에 대한 인식을 심어줘야 되겠다고 생각했고 나부터 어린이 보호구역에 대한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주변에 어린이 보행로가 안전한 지 점검해보자. 그런 것까지 겸해서 스쿨존 홍보 및 개선 캠페인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효율적으로 홍보하기 위한 방안으로 교육청, 경찰서, 시청이 같이 연합으로 해야 되겠다고 생각했고, 또 그래야만 빨리 개선되지 않을까 싶더라고요

그렇게 캠페인을 만들어 꾸준히 시작하니 시민들의 인식이 점점 바뀌어 지더라고요. 벌써 10여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경희 회장의 스쿨존 지키기 캠페인은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문창초교 앞 스쿨존을 정착시킨데 이어서 신풍초, 신흥초 서해초 등 사고가 많은 학교를 중심으로 노란색 존을 완성시켰다.

단순히 교통봉사 뿐 아니라 아이들의 안전한 환경을 만들어가는 역할이 바로 녹색어머니 역할이구나하는 자부심도 생기고 책임감도 강하게 느끼는 계기가 바로 캠페인이라고 봅니다.”

그렇게 녹색어머니가 점점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인상에 가장 남는 활동이나 업적을 꼽으라면?

 

올해로 8회를 맞고 있는 어린이 교통사고 ZERO 운동 촉진대회가 있는데, 제가 전북 회장을 할 때 만들었어요.

물론 남들이 알아달라고 봉사를 하는 건 아니지만, 어느 땐 길거리에서 , 서럽다라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우리들끼리 서로를 위로해 주고 위안을 받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다른 봉사단체와는 달리 녹색어머니회는 거의 연중 봉사를 하잖아요. 이런 행사를 만들어 서로의 노고를 격려하려던 거였죠. 처음에 제가 자비를 털어 시작한 사업이 정착했다는 게 가장 마음에 듭니다.

대회의 취지는 어린이가 안전한 나라, 어린이가 교통사고로부터 보호되는 도시를 만들기 위해서 였지요. 남들이 보기에는 정신 나간 짓을 한 사람이 저예요.

행사비용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데, 이를 지켜보던 남편이 애쓰는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어느 날 신발장 위에 카드를 놓고 거덜 내지 말고 써라면서 고맙게도 카드를 내어줘서 모자라는 800만원 정도를 카드로 긁어서 행사를 차질 없이 마쳤죠.

제가 원래 온화한 사람인데요(웃음). 그런데 그때 녹색어머니회 적극적인 활동 때문에 지금도 이경희라는 사람은 힘이 있는 사람이 된거죠.”

시련은 있었지만 녹색어머니회 조직을 위해서 그리고 제 삶을 위해서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는 이 회장.

 

 

 

16년 동안 녹색어머니회 활동을 해왔는데 앞으로 계획은?

 

저를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제가 베이비 베이비하면 우리 아이들 얘기하는 줄 아는데, 그 말은 녹색어머니 후배들을 말하는 것이에요. 후배들한테 인정받는 것이 정말 너무 고맙죠.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중앙회장까지 했지만 지금도 평회원처럼 학교 앞 도로에 나가서 어린이가 교통사고로부터 안전한 도시, 어린이가 안전한 나라를 만드는데 한 축을 기꺼이 담당하는 게 제 꿈입니다.

 

고향이 군산이 아닌데 어떤 계기로 군산에 정착하게 되었는지?

 

남편을 경기도에서 만나 결혼하고 남편 직장 때문에 대전광역시에서 살다가 아이들이 어려서 시댁이 있는 군산에 1997년에 내려왔지요.

그 때는 잠깐 내려와 1~2년 만 살다가 대전으로 가려고 했어요. 그런데 올해로 22년째 살면서 아예 정착을 하게 되어 군산은 제2의 고향이 되었습니다.

무엇이든지 열정적으로 하다 보니 군산을 중심으로 전주, 서울까지 활동반경이 넓혀졌지만 결국 이제는 정든 군산, 군산 사람들을 떠날 수 없게 되었지요.

 

끝으로 사단법인 녹색어머니회 활동을 소개를 할 수 있도록 지면을 할애하여 주신 매거진군산에 감사를 드립니다. 앞으로도 군산을 지키고 선도하는 정론지로서의 역할을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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