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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들의 Shelter, 모세스영아원
글 : 오성렬(자유기고가) / poi3275@naver.com
2011.12.01 11:18:28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모세스영아원_군산시 개정동 413번지 / 063)452-4075 FAX 452-4076

후원계좌 /  전북은행 551-13-0010312 모세스영아원

천사같은 아기의 얼굴을 보여드리지 못해 사과드립니다. 하지만 아기들의 인권보호가 더 중요합니다.

 

 

태어나는 모든 아기는 순결하다.  아니 이 세상 어떤 언어로 그 지고지순함을 설명할 수 있으랴. 한 점의 때도 묻지 않은 순백의 종이.  그래서 아기와 천사는 이음동의어이기도 하다. 그 종이위에 무엇을 그려 넣는가는 전적으로 어른들의 몫이다.  하지만 원망과 미움을 채워 넣는 어른도 있고 아픔과 눈물로 얼룩지게 하는 어른도 있다.  반면에 오로지 기쁨과 사랑만을 그려 넣는 이가 있으니 ‘모세스영아원’의 전경숙 원장이다. 그래서 그 영아원엔 하루 종일 웃음과 사랑과 축복만이 넘친다.

 

 

모세스 여사(Lucy G. Moses)

 

설립배경

모세스영아원은 군산시 개정동 413번지,  재단법인 한국농촌위생원(옛 개정병원) 부지 안에 있는 영유아 보육시설이다. 영아(嬰兒)원이라 한 것은 보육의 대상이 갓 태어난 젖먹이일 때부터 이기 때문이다. 모세스영아원을 알기 위해서는 수십 년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농촌위생원의 설립자로서 한국의 슈바이처로 회자되고 있는 쌍천(雙泉) 이영춘(李永春)박사 얘기부터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영춘 박사는 1903년 평남 용강 태생으로 평양고보를 졸업한 후 1925년 세브란스 의전에 입학, 꿈이었던 의사가 된다. 이후 약 3년 동안 개업의로써 황해도 평산온천 주재 공중보건의로 부임 받아 활동하는 동안 직접 보고 겪은 피폐한 농촌의 현실은 더 이상 병원을 지속하기가 힘들 정도로 열악하였다. 그래서 개업의를 접고 모교로 돌아가 임상병리학 분야의 실험연구에 몰두하던 중 뜻밖에도 평고 시절 은사이자 경성제대(지금의 서울대) 학생과장 이었던 ‘와타나베’교수로부터 삶의 전환기를 맞는 제안을 듣게 된다. 당시 개정에는 ‘구마모토(熊本)’라는 일본인 농장주가 옥구에서부터 정읍, 화호에 이르기까지 약 900만평에 이르는 소작농과 2만여명에 달하는 소작인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농장 직원들 및 소작농의 질병 치료를 전담할 의사를 수소문하던 중이었다. ‘와타나베’교수는 이영춘 박사에게 바로 이 농장의 진료소장으로 갈 것을 권유했던 것이고 결국 1935년 농장주 ‘구마모토’와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어진다.  이로써 개정면 소재 ‘구마모토’농장의 ‘자혜진료소’소장으로 부임한 이영춘 박사는 농장 직원 및 소작농 약 3,000가구 전가족의 무료 진료를 전담하게 되며 당시 농촌에 만연했던 3대 질병인 기생충, 매독, 폐결핵 등의 퇴치에 앞장서는 등 속수무책이었던 농촌 보건, 위생 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갖기에 이르며 일생을 오로지 이 분야에 헌신하기로 포부를 굳히게 된다. 

 

그러다가 1945년 해방을 맞게 되었다. 자혜진료소에 근무한지 10년 만이다. 모든 일본인이 떠나감에 따라 농장주였던 ‘구마모토’ 역시 자혜진료소와 모든 부대시설을 이영춘 박사에게 일임하고 아쉬운 귀국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이후 이영춘 박사는 자혜진료소를 모태로 하여 재단법인 ’농촌위생원‘과 ’개정병원‘ 및 ’개정간호대학‘을 설립, 의사로써 개인적 영달을 버린 채 평생을 낙후된 농촌 질병 퇴치에 앞장서게 된다.  당시에는 특히 농촌의 경우 보건이나 위생에 관한 인식이 거의 전무하던 때라 유아사망률이 크게 높았거니와 굶주리는 아이, 버려지는 아이도 많던 시절이었다. 어떤 고아원에서는 1년 동안에 한 살 전후의 영유아 수십 명이 전부 사망하는 사례까지 있어 이를 목격한 이영춘 박사는 영유아를 별도 보육하는 시설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1957년 중앙로에 한옥을 얻어 약 30여명의 영유아를 수용, 일심원(一心院)이라 명명하였으니 이것이 영아원이 태동하게 된 효시인 셈이다. 이후 개정 농촌 위생원 부지 안으로 이전하여 운영하던 중 1967년도 국제 로타리 클럽 관계 일로 미국에서 알게 된 ‘모세스’(Lucy G. Moses)란 여성이 이영춘박사로부터 영유아 보육사업의 훌륭한 뜻을 전해 듣고 그 정신에 감동하여 선뜻 거금을 후원함으로써 이 자금으로 현재의 건물을 신축, 1970년도 ‘모세스영아원’으로 원명을 바꾸게 되며 ‘모세스’여사는 신축 원사 준공식 때 급거 태평양을 건너 참석하여 축하해 주었다. 그것이 벌써 41년전 일이다.

 

 


 

영아원의 발자취

영아원의 초기 원장은 이영춘 박사의 부인인 김금련 여사로서 지도력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매사가 철두철미하고 근검절약이 몸에 밴 분이었다. 부안이 고향인 지금의 전경숙 원장이 영아원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82년이다. 김금련 원장은 직원이었던 전경숙의 성실함과 사람됨을 일찍 알아보고 2년 뒤 막내아들(이주운)과 혼인시켜 며느리로 맞는다. 이후 전경숙은 사무국장 직을 맡아 원장이자 시모인 김금련 여사 밑에서 운영 전반에 관한 사항을 세심한 부분까지 꼼꼼히 배워나갔다. 워낙 올곧고 엄격한 분이라서 힘들 때도 있었지만 아이들에 관한 사랑만큼은 세상 그 누구보다도 넘치는 분이었다. 몇 년 뒤 전경숙 부부에게서 두 명의 자녀가 생겼으나 김금련 여사는 수용된 원아들과 똑 같이 대할 뿐 손주라 해서 특별 취급하는 일이 없었고 아들, 며느리가 간혹 손주를 더 챙기는 것을 보기라도 하면 불호령이 떨어졌다. 영아원의 어린이는 모두가 내 손주와 같으며 내 혈육이라 해서 그들과 어떠한 차별도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전경숙은 두 자녀를 영아원 시설에서 보육아들과 함께 기를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야속한 마음과 함께 자녀에게 왠지 미안한 맘이 들기도 하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숭고한 정신에 자신도 점점 감화됨을 느낄 수 있었고 그러한 훌륭한 시모 밑에서 하나하나 보육과 운영을 배우고 인생을 배우는 과정을 거치면서 자아가 성숙되고 사랑과 헌신에 대한 새로운 시야가 트이기 시작한 것은 천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훗날의 큰 자산이 된 건 물론이다.  ‘농촌위생연구원’이나 ‘모세스영아원’에서의 이러한 사랑과 헌신들은 개정교회를 설립하기도 한 이영춘 박사 부부의 독실한 기독교적 가풍에서 기인한 것으로 그녀 자신도 점차 동화되어 갔다. 겉치레나 말을 앞세우지 않는 실천하는 사랑, 헌신하나 대가를 바라지 않는 참 신앙인으로서의 그 분들의 고매한 모습을 닮고 싶었고 닮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1998년도 시모인 김금련 원장이 뜻밖의 병환을 얻어 오랜 투병 생활이 지속되었다. 회복을 고대했으나 병환은 더욱 깊어져 더 이상의 집무가 어렵게 되자 결국 2003년도 1월1일자 전경숙이 원장으로 취임하기에 이른다. 이로써 전경숙 원장은 자신의 일터로서 지난 18여 년간 터득해온 지식과 경험을 소신껏 펼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오로지 귀감으로 삼았던 시모의 큰 사랑과 가르침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으며 이제는 자신이 그 뜻을 계승해 실천하는 일만 남게 된 것이다. 하지만 김금련 여사는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지난 2006년 별세하고 말았으니 향년 86세였다. 


 

 

전경숙 원장과의 인터뷰

 

맥군_ 영아원의 규모 및 운영방침을 알고 싶습니다.

보육 정원은 40명이나 현재의 보호 아동 수는 31명(남아17,여아14)이고, 시설 규모는 연건평 690평방미터(약210평)정도로서 사무실과 상담실, 프로그램 실, 강당, 숙소, 식당 및 조유실 등을 갖추고 있으며, 직원은 원장인 저를 비롯해 사무국장 1명, 간호사 1명, 생활지도원(사회복지사) 13명, 조리원과 위생원 각 1명 등 총 18명이 한 가족이 되어 종사하고 있습니다.  기본운영방침은 바른 인성을 바탕으로 아동 스스로 사랑받는 존재임을 인식하도록 하고 개성과 능력을 개별화하여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는 교육에 주안점을 두고 있으며, 가정과의 관계회복 프로그램을 도입하여 부모와의 관계형성을 위한 노력을 병행함과 동시에 부모와의 분리에서 오는 심리적 불안감 해소를 위한 치료프로그램을 확대운영하고 있습니다. 또한 복지서비스 극대화를 기하기 위해서 지역사회 연계를 통한 인적, 물적 자원 확보와 활용 방안을 모색하는 것 역시 중요한 부분입니다.

 

맥군_ 원아는 어떤 경로로 이곳에 오게 되며 보육기간은 어떻게 되나요?

대부분 주민 센터 등을 통해 오게 되는데, 부부나 가정문제 또는 태어난 아기가 장애아라던 지해서 친부모가 직접 양육하기 힘든 사정에 처한 아이들입니다. 하지만 간혹 아이를 몰래 버리고 가는 가슴 아픈 경우도 있습니다.  한번은 누군가 영아원 밖에 있는 음식물쓰레기통 안에 아기를 버리고 가 마침 지나던 아주머니 한 분이 아기의 울음소리를 듣고 저희 영아원에 데리고 온 일이 있었는데 시간이 조금만 늦었어도 그 아기가 어찌 되었을 지를 생각하면서 얼마나 가슴을 쓸어내렸는지 모릅니다. 그 후로 저는 설령 아기를 놓고 가더라도 그 울음소리를 안에서도 들을 수 있게 건물 외벽 일부를 개조했으며 최소한 밖에 아기가 있음을 알리고는 가라는 의미로 초인종도 설치하게 되었습니다. 그 아이는 저희 영아원 후원자이신 어느 목사님께서 입양하였는데 영리하고 인물도 잘 생겨 목사님 내외는 말 할 것 없고 음악 전공을 하고 있는 그 자녀들로부터도 얼마나 사랑을 받으며 자라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렇다 해서 저는 그 아이를 버린 사람을 한 번도 탓하거나 원망해본 적이 없습니다.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겠지요.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천사 같은 그 아이를 선물로 받았다는 느낌이 앞서 행복하고 이제 세 살이 되었는데 새로운 부모를 만난 훌륭한 그 가정에서 밝고 반듯하게 자라기를 바랄 뿐입니다.  보육아동들은 5살이 되면 외부 어린이집(유치원)에 보내게 되며 만 여섯 살에 저희 영아원을 떠나게 되는데 영아원의 법적 보육기간이 만 6세까지이기 때문입니다. 기간이 차면 부모가 데려가는 경우도 있고 그 때까지 연고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정든 아이들이지만 타 보육시설로 보낼 수밖에 없습니다.  간혹 입양을 원하는 사람이 있기도 한데 이젠 세태도 바뀌어 과거엔 홀트아동 복지회 등을 통한 해외입양이 많았습니다만 최근엔 거의 국내입양이 이뤄지고 있는 추세로서 금년의 경우 2명이 입양되었고 부모가 데려 간 아이가 6명, 그리고 타시설로 전원한 아이가 15명입니다. 반대로 새로 입소한 아이는 15명으로서 현재 31명을 보육하고 있습니다.

 

맥군_ 대표적인 교육프로그램을 소개 해 주신다면?

크게는 상담프로그램과 교육프로그램을 들 수 있는데 아동상담프로그램의 경우 초기상담, 개별상담, 가족연고자상담, 유치원 생활상담 등을 통하여 아동의 건강과 정서적 안정 및 자아정체성 확립을 도모하고 가족과의 지속적인 교류로 부모로부터의 분리불안감을 해소할 뿐만 아니라 양육방법을 공유함으로써 체계적인 보육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교육프로그램에 있어서는 예체능(음악, 율동), 치료(미술, 언어, 심리), 문화 활동(예술, 민속, 독서), 사회적응(체험학습, 생일파티), 가족방문(부모교육, 부모초청행사), 학습(학습지, 영어), 교류 (타 아동시설, 지역단체), 안전(소방, 교통, 재난, 실종유괴 등), 건강(건강관리, 급식 및 간식, 위생), 캠프, 아동인권, 성교육프로그램 등을 운영하고 있는데 이를 통하여 아이들 마음속에 내재된 마음의 상처를 지우고 자신감을 키워줄 뿐만 아니라 밝고 건강한 아이로 성장케 하자는데 목적이 있으며 그 효과도 대단히 크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맥군_ 운영하면서 느낀 보람, 그리고 어려움도 있을 텐데요. 

무엇보다 입소 당시 건강이 좋지 못했던 아이가 정성스런 보살핌으로 건강을 찾았을 때 무한한 기쁨과 보람을 느낍니다. 게 중에는 구순, 구개 파열이 있는 아이도 있고, 다운증후군이 있는 아이가 심장이 안 좋아 수술 후 봉합도 못하고 수술실에서 나오는가 하면 심지어 식도와 항문이 없는 채로 태어난 아이, 폐가 나빠 숨 쉬는 것조차 힘들어 하던 아이 등등 너무도 가슴 아픈 사례가 많습니다. 이런 아이들은 도내 유수한 병원에 입원시켜 필요한 수술과 치료를 받게 하는데 영아원의 정해진 예산만으로는 한계가 있어 안타까울 때가 많습니다만  다행히 후원해 주시는 분들이 있고 도움을 주시는 의사 선생님도 있습니다. 참으로 고마운 분 들 이지요.  그리고 영아원에 입소한 모든 아이들이 잘 적응하는 것은 아닙니다. 무연고 아동으로 적응에 어려움을 겪는 아이는 입양기관과 협력하여 좋은 가정으로 입양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으며 입양아들이 사랑받고 행복하게 자라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 것 역시 큰 보람 중의 하나입니다.  어려움이라면 우선 인력이 부족하다는 점입니다. 타시설과는 다르게 아직 젖먹이인 영아들을 보육하는 관계로 아이가 병원에 입원하기라도 하면 직원 두 명이서 간병을 해야 하므로 그만큼 공백이 생기니까요. 또한 후원이 줄고 있는 것도 문제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사회적으로 많이 알려진 조직이나 단체에 후원은 많으나 상대적으로 저희처럼 음지에 있는 시설에 대한 후원은 점차 감소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후원은 무엇이 됐던 필요한 물품(예컨대 종이 기저귀 등)이나 비록 소액일지라도 기부해 주시는 분이 늘면 운영에 큰 힘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맥군_ 모세스영아원만의 자랑거리가 있다면? 

저희 시설은 직원들 모두가 가족적인 분위기에서 생활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 드리고 싶군요. 저는 원래가 지시에 의해서 움직이는 수직적 상하관계나 상명하복의 조직 문화를 싫어합니다. 그렇게 해봐야 분위기만 경직될 뿐 기대 효용치가 높아지는 것도 아니니까요. 그래서 저는 원장이라 해서 직원들에게 일방적 지시를 내리지 않습니다. 그러기보다는 화목을 중시하고 각자가 자신의 일에 책임감과 긍지를 가지고 임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이끌고 리마인드 시켜줌으로써 가족 같은 분위기를 만들고자 합니다. 사실 아무리 직원이라 해도 자기 혈육도 아닌 아이를 자기 자식처럼 보살핀다는 것은 대단한 사명감이 없이는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힘든 순간도 있고 회의가 들 때도 분명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에 왜 모여 있는가’ 라고 말입니다. 급여를 받는다는 점에서는 여느 직업과 다를 바 없겠지만 이곳은 특성상 일정부분 자기 희생정신과 모성애가 발휘되지 않으면 종사하기 힘들다는 점에서 여타 직업과는 분명 다른 그 무엇이 있습니다. 다행히 직원들 모두 제 생각과 방침을 잘 이해하고 적극 동참하여 이제는 저보다도 더 보육에 열성적입니다. 저희 영아원에 오셔 보면 금방 느끼시겠지만 아이들이나 직원들 모두 얼마나 밝고 명랑한지 모릅니다.  간혹 힘들고 어려운 일이 생기기라도 하면 회피는커녕 서로가 자기가 하겠다고 나서는 직원들을 보면서 저는 이런 직원들이 너무도 자랑스럽고 고맙게 느껴집니다. 선생님들 역시 천사의 심성을 지녔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저희 영아원엔 항상 친절과 배려, 사랑의 에너지가 넘쳐 마치 한 가족 같은 화목이 유지되는 게 아닌가 합니다. 이 기회에 다시 한 번 직원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맥군_ 영아원 살림은 어떻게 꾸려나가고 있나요.

건물은 재단법인 농촌위생원(대표 이주운) 소유이나 부지는 타인에게 소유권이 넘어간 상태라서 일정부분 애로도 있습니다만 사업 자체의 공공성으로 인하여 기본적으로 시에서 직원들의 급여 등 운영비의 일정부분을 보조해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의 치료나 보육에 따른 여타 경비는 후원금이 없으면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간 종교단체를 비롯해서 많은 분들이 후원을 해 주셨는데 경기가 어려워선지 갈수록 감소하고 있는 안타까운 실정입니다. 

 

맥군_ 향후 계획을 알고 싶은데요.

저희 영아원의 원훈이 ‘어린이에게 밝은 웃음을’ 입니다.  가정의 해체로 마음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아이들, 그리고 몸이 건강치 못한 아이들을 최선을 다 해 돌보고 치유함으로써 그 아이들 모두 밝은 웃음을 되찾고 밝은 세상을 만들어 가는 훌륭한 사회구성원으로 자라날 수 있도록 저희 영아원 가족 모두는 더 열심히 자세를 가다듬고 노력하고자 합니다.

 

맥군_ 관계기관 또는 시민들께 당부말씀이 있다면? 

아이들은 부모가 1:1로 키우는 게 가장 이상적인데 현실적으로 미혼의 선생님의 경우 한 사람이 여러 명의 아이를 양육하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아무쪼록 관계기관 및 지역사회의 관심과 자원봉사, 그리고 사회복지시설에 훌륭한 인력이 배치될 수 있도록 모두가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합니다. 따라서 비록 적은 금액이나 물품일지라도 도움을 주시는 분을 정말 필요로 합니다. 후원품은 기부하신 분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우리의 천사 같은 아이들이

심신의 건강을 되찾아 밝고 바르게 성장하도록 요긴하게 쓰여 훗날 큰 보람으로 남으리라 확신합니다. 

 

맥군_ 여담입니다만 이영춘 박사님 얘기로 잠깐 돌아가서 저희 조부(吳永泰)님과 박사님이 절친 이셨다는 것을 아는 분은 워낙 세월이 많이 흘러 지금은 많지 않은 듯합니다만 박사님의 아호를 쌍천(雙泉)이라 한 내력과 관련해서 그 얘기를 잠깐 드릴까 합니다. 저희는 구암동에 살았고 경성고보를 나오신 조부님께선 31세 되던 해(1932년)옥산초등학교 교장으로 부임 받아 4년간 재임하신 후 40대 초반에 개정면장을 역임하셨는데 당시 구마모토 농장의 의료소장으로 계시던 박사님과 업무적인 일로 자주 만나면서 친교의 연을 맺었던 것 같습니다.(이영춘著 ‘나의 교우록’ 참조) 제가 초, 중 시절이던 50~60년대만 해도 조부님은 구마모토 농장과 이영춘 박사님 얘기를 자주 하셨고 조부님을 따라 개정병원과 박사님 자택에도 가끔 갔던 기억이 납니다. 저희 가족은 병이 나면 개정병원에서 진료를 받았는데 후에 모친을 통해 알게 된 얘기입니다만 저 자신도 박사님 아니었으면 이 세상 빛을 보지 못한 채 죽고 말았을 거라 하시더군요. 당시 모친은 갓 스무 살의 초산이어서 저를 낳을 때 극심한 난산으로 산모나 산아 모두 생명이 위태로운 절체절명의 순간을 맞았었다 합니다. 그러자 급히 연락을 받은 박사님께서 담당 의사를 대동하고 오셔서 천신만고 끝에 기구를 이용하여 가까스로 무사히 분만을 마칠 수 있었다 하는데 이 사실 한 가지만으로도 박사님은 저희에게 큰 은혜를 남겨주신 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제가 중학생 때였던 것 같은데 한번은 조부님께서 ‘이박사 호를 내가 하나 지었다’ 라고 말씀 하시기에 여쭤보니 ‘쌍천(雙泉)’ 이라기에 철없던 어린 마음에 ‘쌍’이란 음절이 왠지 맘에 들지 않아 별로 멋진 호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지금은 참으로 박사님께 잘 어울리는 의미 있는 호로써 회자되고 있는데 말이지요.  재단법인 농촌위생원의 이사(理事)이기도 했던 조부님과 박사님의 우정은 조부님께서 급작스런 뇌출혈로 세상을 뜨시던 날(1971년)까지 지속되었으며 조부님 장례 때는 박사님께서 호상(護喪)을 해 주시기도 하는 등 친구를 잃은 슬픔에 누구보다도 애석함을 감추지 않으셨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 합니다. 그래서 제 마음속에는 아직도 박사님 댁과 개정병원에 대한 애잔한 추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고요. 

저도 오래 전 오영태 선생님에 관한 얘기는 시댁의 어른들을 통해서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 당시는 오 선생님의 존함보다는 오 면장님이라고 다들 불렀던 것 같아요. 사실 시부님의 아호를 누가 지었는지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어 박사님 본인이 지으신 게 아닌가 하는 얘기도 있는데 말씀을 듣고 보니 이제야 의문이 풀리는 것 같네요. 이제 박사님의 그 친구였던 오영태 선생님의 손자 되시는 분과 이렇게 만나 지난 얘기를 나누게 될 줄 어찌 알았겠습니까.  참으로 반갑고 여러 가지로 감사합니다.

 

맥군_ 이영춘 박사님 가문의 며느리로서 처신하기가 쉽지만은 않을 텐데요. 어떻습니까?

솔직히 쉽지만은 않습니다. 부담스러운 면도 있고요. 시부모님께서 워낙 훌륭하고 널리 알려진 분이라서 매사에 조심스럽습니다. 제가 아무리 노력한다 한들 그 분들의 발끝도 따라갈 수 없겠지만 최소한도 누를 끼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매사 삼가고 조심하는 자세로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딜 가나 저는 제 이름이 버젓이 있는데도 꼭 이영춘 박사의 며느리라는 호칭이 따라 붙고 그 관점에서만 저를 평가하려 하는 것 같아 불편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조금은 억울한 면도 있고요. 이제는 저를 이영춘 가문의 며느리라기보다는 그냥 전경숙이라는 한 인격체로 보아주셨으면 합니다.  어떻게 하던 제 생활이나 앞날은 크게 달라질 것이 없겠지만 그래야 제 마음이 조금은 편해지지 않겠습니까.

 

원장실에서 이야기를 나누면서 보니 간혹 문 밖 복도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직원들과 원아들의 모습이 눈에 띠는데 어쩌면 그렇게 하나같이 친절하고 표정들이 밝은지 덩달아 기분이 좋아질 정도다. 이런 분위기를 만들기까지 알게 모르게 전경숙 원장은 많은 공을 들였을 터이다. 겉치레나 이해타산에 익숙지 않은 성품은 시댁의 가풍에서 연유한 것일까. 수익사업을 하기로 들면 유치원이 나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는 비록 어려운 살림이지만 모세스영아원과 평생을 함께 할 듯 하다. 그것은 무엇보다 시부모의 숭고한 유지를 받드는 일 일 뿐더러 사랑스런 아기천사들이 있는 곳이라서 그렇단다. 언제 봐도 단정하면서도 검소한 옷차림,     연륜이나 직함에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구형 소형차, 하지만 그녀의 표정에서 읽혀지는 편안함과 행복함은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 하고 긍지와 보람을 갖는 데서오는 자신감이 아닌가 한다. 아무쪼록 모세스영아원에 시민들의 따뜻한 관심의 손길이 이어져 우리의 예쁜 아기천사들이 티없이 밝고 건강하게 자라나는 데 어려움을 덜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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