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례
등에 점이 많아 점례라는 이름이 지어졌다는 오점례 씨(88). 그녀처럼 기이하고 독특한 삶이 또 있을까. 전북 장수에서 가난한 농가의 막내딸로 태어나 15세에 시집을 갈 때만해도 그저 어리고 순박한 시골 처녀에 지나지 않았던 그녀에게 또 다른 인생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그땐 어찌 짐작조차 할 수 있었으랴.
영문도 모르고 부부가 된 8살 연상의 신랑은 첫인상부터 맘에 들지 않았고 시어머니는 무섭기만 해서 나어렸던 그녀에게는 모든 것이 낯설고 힘든 일 뿐이었다. 그러나 귀머거리 3년 벙어리 3년이라 했던가, 시댁 역시 어려운 형편이었던지라 그저 묵묵히 힘든 농가 일을 하면서 살림을 배웠고 3년이 지난 18세 되던 해 첫딸을 낳았다. 그리고 1~2년 터울로 계속 자녀가 생겼다.
그녀 나이 28세 되던 무렵 가족 모두 군산으로 이주했다. 이때부터 그녀의 운명은 전혀 상상치도 못했던 세계로 바뀌게 된다. 신병이 찾아온 것이다. 그것은 너무도 어이없고 급작스런 일이어서 남모르는 고통이 시작되었다. 신내림을 받지 않으려고 나름 속병을 앓으며 별별 방법을 써보았지만 그럴수록 고통은 더해갔다. 그러자 어느 지인이 기독교 신앙을 가져보라 권유했다.
그녀는 그 지인을 따라 당시 중앙로에 있던 D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교회에 나가면서 어느 정도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었던 그녀는 38세 되던 무렵 권사 직분도 갖게 됨으로서 누가 봐도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기도 중에도 신의 환영이 또렷이 보이고 몸이 아픈 신자의 집에 심방을 가게 되면 머릿속에서 그 집의 내력과 죽은 이의 혼령이 선명히 떠오른다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 그녀를 찾아왔다. 실체는 없었지만 목소리에는 거역할 수 없는 위엄이 있었다. 그것은 너무 뜻밖이었다. ‘이제부터 나는 네 몸을 빌릴 것이다’라며 빙의(憑依)를 예고하는 그 목소리는 환청이면서 실제 같기도 했다. 그녀는 그 목소리의 주인을 산신이라 했다. 그 산신은 일상에서도, 꿈속에서도 나타났다. 어느 날부터는 명령이 준엄해졌다. ‘이제 그만 신앙생활을 접고 백두산으로 들어가라’는 것이었다. ‘38선으로 들어가라’고도 했다. 신내림을 거부하려고 몸부림치는 사이 멀쩡했던 생손톱, 발톱이 빠지는 처절한 고통이 뒤따랐다. 그러나 끝내 그것은 거역할 수 없는 그무엇이었다. 그녀는 교회를 접었고 목사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무렵 그녀의 나이 38세였다.
이제 그녀는 자신이 아닌 그 산신의 뜻대로 살아가는 운명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 산신은 그녀에게 하느님이었다. 그녀는 어느 날 자기도 모르게 집을 나서 무작정 험준한 산속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가서 보니 태백산이라 했다. 남편도 자기를 말릴 수 없었다. 온갖 추위와 산짐승들이 들끓는 산중에서의 생활은 그야말로 제대로 먹지도, 편히 눕지도 못하는 풍찬노숙(風餐露宿)의 연일이었다. 이후 지리산, 북악산 등지를 전전하면서도 신과 교감하며 열심히 기도에만 정진했다. 이제 그녀는 일거수일투족을 그 신의 뜻에 따라야 했다.
주연
그렇게 100일 기도에 접어든 어느 날 산신의 계시가 들려왔다.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꿈같기도 했던 100일을 보내고 집에 돌아오니 큰딸아이가 동생들에게 엄마 노릇을 해주고 있었다.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이라 체념한 그녀는 본격적으로 무속인의 길을 걷게 되는데 산신으로부터 ‘주연’이라는 새로운 이름도 받게 된다. 이제는 점례가 아닌 주연으로서 동흥남동에 신당을 꾸미고 새로운 삶이 시작된 그녀는 그야말로 귀신같은 통찰력으로 보는 이들의 혀를 내두르게 했다. 남이 볼 수 없는 것도 그녀의 눈에는 훤히 꿰뚫어 보였다.
굿으로 아픈 이를 낫게도 하고 금방 죽은 이를 살리기도 하여 주위를 경악케 했다. 남의 묘 속도 훤히 들여다보여 물이 차 있다든가 하는 훼손 상태를 정확히 집어내 그 자손들이 파묘를 해보면 과연 맞는지라 감사 인사도 수 없이 받았다. 이토록 용하다는 것이 입소문을 타고 알려지면서 그녀의 집은 점을 보러오는 이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특히 선거철에는 후보자들이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들었고, 우환이 있는 가정의 부탁으로 출장 나가 밤새 굿을 하는 일도 한 달이면 보름 이상이나 되었다. 또한 죽은 사람의 영혼결혼식도 많이 치러주기도 했는데 신랑, 신부 대용의 인형을 만들어 신방까지 꾸며주는 등 격식을 다함으로써 혼령의 한을 달랬다.
심지어는 어떻게 알았는지 먼 타지에서도 부탁이 쇄도하고 있었다. 이러다보니 수입도 크게 늘어 어느 달은 당시만 해도 거금인 2천만 원을 넘길 때도 있었다. 그야말로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를 정도로 바쁘게 돌아갔다. 산신께서 주신 ‘주연’이라는 법명을 가지면서 모든 것이 거짓말처럼 술술 풀리고 팔자가 피고 있었다. 자신의 눈에는 또렷이 보이건만 보통사람의 눈으로 보일 리 없고 증명해 낼 수도 없기에 사람들은 이 현상을 두고 미신이라 치부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신의 조화라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다.
마리아
그녀가 50여년 무속인의 길을 접은 것은 2년 전이다. 나이도 많아 기력도 예전 같지 않거니와 무엇보다 산신의 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기도 중 홀연히 모습을 드러낸 신령은 그녀에게 ‘이제 네 갈 길을 가도록 하라’는 예지를 주었다. 문득 지난 세월을 뒤돌아보니 모든 것이 꿈만 같았고 비로소 꿈에서 깬 듯도 했다. 남편은 50대 초반 세상을 뜨고 열 두 자녀 중 여섯 자녀만 생존해 있지만 일생 모진 풍상을 겪으며 산신의 딸로 열심히 살아온 세월이기도 했다. 그녀는 2012년 부활절을 맞아 어느 신자의 인도로 천주교에 귀의했다. 그것은 신의 뜻이기도 했다.
그녀는 ‘마리아’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그리고 레지오 활동도 열심히 하고 있다. 88세라는 나이가 무색할 만큼 눈빛이나 말투나 기억력이 형형한 그녀는 이제는 천주님을 믿는 가톨릭 신자로서 건강하고 경건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녀가 건강을 유지하는 또 하나의 비결은 그 연세에도 풀 뽑기 등 공공근로에 나갈 정도로 천성적으로 지닌 부지런함이다. 그 수입이라고 해봐야 월 20만원 남짓이지만 돈을 떠나 밖에서 친구들을 사귈 수 있고 소일거리를 만나 심신에 권태로움을 주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도 즐겁다.
둘째 딸이기도 한 국악인 육금자 씨가 수시로 어머니를 찾아 돌봐드리고 지난 일로 이야기꽃을 피우며 웃기도 하는 이들 모녀의 모습도 보는 이들을 흐뭇하게 해주는 정경이다. 이제 인생의 먼 길을 돌아온 그녀는 자신의 세례명이기도 한 성모 마리아 성단에 촛불을 밝히고 자비로우신 그 분의 사랑과 은총을 축원하며 마음의 평정 속에 넘치는 기쁨을 얻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