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감은 존재한다. 다만 그것이 일할 때 나를 찾아오도록 해야 한다.”— 파블로 피카소
천재 화가로 불리는 피카소는 회화뿐 아니라 판화, 드로잉, 도예와 조각에 이르기까지 평생 5만 점이 넘는 작품을 남긴 다작의 예술가였다.
큐비즘으로 현대미술의 지형을 바꾼 그에게 도예는 또 하나의 새로운 예술 언어였다.
특히 발로리스에서 탄생한 도예작품은 회화와는 다른 방식으로 발휘된 그의 창조성을 보여준다.
8월의 무더위가 한풀 꺾인 주말, 전북도립미술관 전시관은 관람객들로 붐볐다.
저물어가는 여름날, 피카소가 흙 위에 펼쳐놓은 자유로운 상상력과 마주하며 또 하나의 예술 세계를 만났다.

도자기를 캔버스처럼 다룬 피카소
피카소가 본격적으로 도예를 시작한 것은 1946년, 65세 무렵이었다.
당시 연인이었던 프랑수아즈 질로와 프랑스 남부 발로리스의 마두라 공방을 찾은 것이 계기였다.
공방을 운영하던 조르주와 수잔 라미 부부와의 만남은 그의 예술세계에 새로운 전환점이었다. 피카소에게 흙은 단순한 재료가 아니었다.
흙을 빚고 긁고 붓으로 그리고, 다양한 물체의 흔적을 찍어내며 평면의 회화에서 벗어나 입체와 표면, 형태와 질감을 실험했다.
도자기 자체를 하나의 캔버스처럼 다룬 것이다.
특히 그의 도예 작업에는 에디션(édition), 즉 하나의 원형을 바탕으로 일정 수량을 제작하는 방식이 활용되었다.
이를 통해 도예작품은 많은 사람들에게 소개될 수 있었다. 작품에는 제작자와 공방, 에디션 등을 확인할 수 있는 표시가 남기도 한다.

하나의 대상 안 여러 시선과 이미지 존재
도자는 피카소에게 자유로운 조형 실험의 장이었다.
둥근 접시는 어느 순간 얼굴이 되고, 화병은 새나 동물의 형상으로 변한다.
시선을 옮기는 순간 여인의 얼굴이 올빼미로 보이고, 화병의 둘레를 따라가다 또 다른 얼굴과 마주한다.
하나의 대상 안에 여러 시선과 이미지가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에게 반복은 단순한 복제가 아니었다.
같은 모티프를 끊임없이 변주하며 형태가 어디까지 달라질 수 있는지를 탐구하는 과정이었다.
흙은 자유로운 상상의 세계
스페인에서 태어난 피카소에게 중요한 주제였던 투우 역시 도예 속에서 인간과 동물, 삶과 죽음의 긴장감을 담은 이미지로 다시 태어났다.
인간과 동물을 넘어선 투우의 장면들은 발로리스의 뜨거운 태양과 생동하는 열정으로 피카소 특유의 선과 형태로 다시 태어났다.
어쩌면 피카소에게 흙은 가장 자유로운 캔버스였는지도 모른다. 그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기보다 자신이 보고 상상한 세계로 다시 만들어냈다.

예술은 끊임없이 변형하고 다시 바라보는 과정
예술은 완성된 하나의 답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형하고 다시 바라보는 과정이었다.
65세에 시작한 피카소의 도예, 새로운 재료 앞에서 그는 다시 어린아이처럼 질문하고 실험하는 또 다른 예술가로 탄생했다.
캔버스에서 시작된 상상력은 흙으로 옮겨갔고, 흙은 불을 만나 다시 태어났다.
피카소에게 나이는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예술을 시작할 수 있는 하나의 문이었을까.
흙을 만지는 순간에도 그는 새로운 세계를 꿈꾸었고, 그 꿈은 다시 태어났다.
누구에게나 예술은 언제든 다시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피카소의 예술에는 끝이 없다’라는 말이 태어나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