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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그 너머의 이야기】 국가무형문화재 제23호, 인간문화재 이영희 선생님. 김윤덕류 가야금산조와 병창의 보유자
글 : 정미란 / jmr6114@hanmail.net
2026.10.13 14:25:36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대한민국 국악제전에서 우연히 만난 이영희 선생님이 군산여고 동문이었다.

깜짝 반가워하며 알게 된 여고 후배의 소개로 대선배인 이영희 선생님을 찾아간 곳은 경기도의 한적한 동네였다.

자그마한 텃밭이 있는 주택에서 만난 선생님은 하얀 머리에 가녀린 듯 편안한 모습이었다.

처음 보는 후배를 향한 함박웃음이 너무나 환하셔서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친구 같았다.

여든을 훌쩍 넘긴 나이가 믿기지 않게 말씀도, 걸음걸이도, 우리를 바라보는 눈빛도 맑고 건강했다.

 

60여년 전, 생생했던 군산의 모습 기억

 

무엇보다 대화를 나누는 동안 오래전 기억을 꺼내는 순간마다 소녀처럼 환하게 웃는 모습은 영락 여고 시절 소녀 같았다.

처음 만난 여고 후배와 함께 고향 군산과 모교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여고 시절의 기억부터 가족 이야기, 평생 국악의 길에서 만났던 사람들까지 선생님의 기억 속 시간들이 하나둘 펼쳐졌다.

“경찰서가 있는 그 길에 영동이 있었어”

선생님은 60여 년 전 군산 영동의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우리 집 옆에 천양각, 한양사가 있었지. 공주여관, 일구여관이 유명했는데 그 집 딸들이 무용 배우는 걸 보고 엄마한테 말했지. 왜 난 무용 배우면 안 되냐고.”

그렇게 무용에 대한 갈망이 시작되었다.

구시장에서 장삼을 빌려 무용을 배우러 다니던 여고 시절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오래전 군산의 거리와 사람들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인연, 그리고 기억

 

1930년대 군산에서 경성고무를 운영했던 이만수 사장이 부친의 사촌이었다는 이야기, 그 인연으로 어머니가 만월표 고무신 가게를 운영했던 이야기, 세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로 4남매를 키워낸 어머니 이야기까지. 선생님의 기억 속 군산은 단순한 지명이 아니었다.

사람과 집과 가게, 그리고 어린 시절의 꿈이 켜켜이 쌓여 있는 삶의 모습이었다.

전쟁 속에서 헤어진 친구를 대학에서 다시 만나셨다고 하셨다.

어린 시절 전쟁통에 부산에서 만난 동갑내기 친구 이혜선 씨 이야기를 할 때면 선생님의 얼굴에는 다시 여고생 같은 웃음이 번졌다.

서울이 수복되면서 서로 연락이 끊겼던 두 사람은 이화여대에서 운명처럼 다시 만났다.

그리고 훗날 국무총리 후보가 되었던 장상 교수와 함께 세 사람은 대학 시절 늘 붙어 다니던 친구가 되었다며 웃으셨다.

대학 4학년 때 중앙방송국, 지금의 KBS가 주최한 국악 콩쿠르에서 수상한 선생님은 심사위원의 추천으로 국악예술학교 교사가 되었다.

국악예술학교에서 함께했던 예인들의 이름을 하나씩 꺼내놓는 선생님의 기억은 바로 엊그제 일처럼 생생했다.

박녹주, 박초월, 김소희 같은 명창들과 거문고의 김영재 명인. 당대 최고의 예인들과 한 시대를 함께 살아온 선생님은 자신의 이야기를 크게 내세우지 않았다.

“내가 여기까지 온 건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좋은 선배들과 함께했기 때문이야.”

명인의 삶을 이야기하면서도 자신보다 앞서있던 선배들을 먼저 이야기하는 얼굴에 감사함이 가득했다.

      

 

세월은 흘렀어도 가야금 앞은 현재진행형

 

지금도 일요일마다 후배들을 가르치신다는 가야금 명인의 열정이 널찍한 거실 한편에 세워놓은 수십 개의 가야금들에서 진하게 느껴졌다.

요즈음은 딸 같은 후배들, 함께 활동했던 국악인들과 만나 즐거운 시간 보낸다며 행복한 웃음을 지으셨다.

세월은 흘렀지만 가야금 앞에 앉는 일만큼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었다.

국악을 공부하려는 젊은이들에게 무엇을 해주고 싶으냐는 질문에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젊은이들에게 힘든 예인의 길을 권하고 싶지는 않아.”

평생 예술가로 살아온 명인이 후배들에게 예술가의 길을 권하지 않는다는 말에는 오랜 세월 직접 겪은 현실이 담겨 있었다.

재능이 있어도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예술을 포기해야 하는 현실. 그래서 선생님은 국가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했다.

재능 있는 예인들이 생계를 걱정하지 않고 예술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2022년에는 무형문화재 전승교육관 건립을 위해 50억 원 상당의 개인 토지 1,700평을 문화재청에 기부했다.

전수관을 세우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도 분명했다. 직업적인 민간 예인들이 활동할 수 있는 재인청의 설립도 필요하다고 힘주어 말씀하시는 선생님의 표정이 단호했다.

     

      


“고향에 꼭 한번 가보고 싶어.”

 

평생 독신으로 살아오며 모은 재산을 자신을 위해 남겨두기보다, 재능 있는 후배 예인들을 위해 쓰겠다는 88살 예인의 삶은 그래서 태산처럼 크게 다가왔다.

고향을 떠난 지 수십 년. 바쁜 국악 활동 때문에 정작 고향에는 제대로 와보지 못했다는 선생님은 군산 이야기를 할 때마다 아쉬움과 그리움을 함께 드러냈다.

“고향에 꼭 한번 가보고 싶어.”

일정을 정해 모시겠다고 하자 선생님은 반갑게 웃었다.

그리고 드디어 고향 군산에서 우리 후배들은 선생님을 만났다. 필자와 함께 유귀옥 군산여고 증경회장, 최경희 동문, 그리고 선생님의 문하생들이 함께했다.

군산의 골목골목을 보시며 진작 오지 못한 지난 시절이 아쉽다고 여러 번 말씀하는 모습에서 소녀와 백발의 선생님 모습이 교차되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달라진 군산의 모습에 놀라면서도 영동을 돌아보며 회한에 젖었고 근대역사박물관에서는 어릴적 인력거를 탔던 경험이 엊그제 같다며 활짝 웃으셨다.

생전에 어머니가 운영하셨던 박물관의 '만월표 신발가게'를 발견하자 깜짝 반가워하시며 진열된 고무신을 어루만지며 어느새 눈가가 촉촉해지셨다.

고향의 이곳저곳을 돌아보며, 당신 사진을 찍는 후배들을 말리면서도 사진 속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는 표정의 선생님은 영락 소녀였다.

     

      

    

       


아직 끝나지 않은 삶의 연주

 

모든 사람이 뛰어난 재능을 갖고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고 그것을 한평생 갈고닦아 세상에 내놓는 일 또한 결코 쉽지 않다.

더 어려운 것은 그렇게 얻은 명성과 재산을 다시 세상에 돌려주는 일이다.

이영희 선생님은 평생 예술을 위해 살았다. 그리고 이제 그 삶의 결실을 또 다른 예인들을 위해 쾌척하셨다.

자신이 받은 것을 다음 세대에게 돌려주는 마음.

어쩌면 선생님이 생각하는 진정한 전승은 가야금의 선율만을 이어가는 일이 아닐 것이다.

한 사람이 평생 지켜온 예술에 대한 마음과 후배를 향한 책임까지 건네려는 깊은 뜻도 함께라고 생각되었다.

서울로 돌아가는 선생님께 인사하며 말했다.

“늘 건강하시고, 더 이상 안 늙으셨으면 좋겠어요.”

선생님이 환하게 웃으셨다. 그리고 어린아이처럼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걱정 마! 나는 백 살까지 살 거야~^^”

마음속에 아직 하고 싶은 일이 남아 있다면 선생님의 그 말은 약속이 아닌 ‘아직 끝나지 않은 삶의 연주가 아닐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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