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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 더민주혁신회의 전북 공동대표
글 : 채명룡 / ml7614@naver.com
2025.04.30 10:18:54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힘든 군산, 공동체적 선비 정신으로 극복해야  

 

스스로는 운동권, 기독교인라고 했다. 하지만 과묵하고 신중한 그의 모습은 심지 곧은 선비에 다름 아니었다. 

글 읽는 선비 노릇 하기가 어렵다고 한탄하시며 끌려간 대마도에서 스스로 절명하신 조선말 유학자이자 의병장 최익현 선생을 존경한다고 했다.

지난 2019년 12월 건강상의 문제라는 소문만 남기고 정계에서 물러선지 6년.  

누구의 말이든 다 들어주는 ‘형님 리더십’으로 시민들에게 다가섰던 황진씨가 다시 돌아 올 수 있을까. 봄 바람이 기지개를 켜고 있다.  

지난 2020년 4월 15일의 총선 당시, 김관영 바른미래당 의원에 대항하여 신영대 더불어민주당 지역위원장과 황진 시민운동가가 민주당 공천장을 두고 치열하게 맞붙었다. 

그러나 하늘은 그를 비껴갔다. 

언론에 알려지기로 “수 년 전의 건강상의 문제가 있어서 쉬면서 치료를 받았는데, 경선을 하면서 과로 등으로 건강이 나빠져 모든 것을 내려놓고자 한다.”였다. 

치과 의사로 일하면서 생긴 능력의 일부로라도 어렵고 힘든 이들과 함께하려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을 가진 행동가이자 종교인이 바로 황 진 원장이다.  

요즈음 그는 더불어민주당 내 친이재명 원외조직 더민주혁신회의 전북 공동대표를 맡아 조심 조심 세상 속으로 발걸음을 돌리고 있다. 

  

시골 분교(?) 출신, 치과 의사가 되다 

 

아버지가 일직 세상을 뜨자 돌아간 고향 함열읍 다송리 391번지에서 할아버지 손에서 자란 황진은 할아버지가 터를 기부하여 유치한 시골의 작은 학교 출신이다. 동네 친구들이 6학년까지 계속 한 반 이었다. 함열에서 중학교를 다녔고 남성고에 입학하면서 세상을 하나씩 알아갔다.  

“배운다는 의미와 가르치는 선생님이라는 존재가 어떻고, 어떻해야 하는지를 경험한 제 인생의 가장 의미있는 시기였죠.” 

교내 유도관에서 운동도 하고, 명사 강연도 들었다. 생각의 깊이와 폭을 정연하게 넓히는 신문 사설의 중요성도 이 때 배웠다. 

“오늘날의 교육 현장과는 많이 다른 분위기였는데, 멋지고 탁월한 친구들과 함께 배우고 교제할 수 있는 제 인생의 가장 귀중한 때였죠.” 

청소년기를 지나면서 어린 황진에서 청년 황진으로 탈바꿈 하는데에는 남성고에서의 학습과 다양한 경험이 큰 바탕이 되었다.  

“내심 문과쪽을 선호했는데, 치과대학이라는 게 전문 직업학교와 비슷하다고 생각했거든요. 담임 선생님께서 특별히 권하셔서 이과쪽이라서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이 또한 하나님이 주신 기회라고 생각했죠. 요즘 가끔씩 당시 스승님의 조언이 없었다면 무엇이 되었을까 생각하죠.”  

고3 청소년기의 황진은 담임 선생님께서 원광대 치의학과 진학을 권유하자 그대로 따랐다. 

  

첫 월급 27만원 공중보건의, 이후 중앙로에 개원 

 

대구의 군의학교와 영천의 삼사관학교에서 군사 훈련을 받은 치과의사 황진은 군산의 성산보건지소에서 첫 근무를 시작으로 대야의 옥구군 보건소 등 모두 3년을 보건소에서 근무했다. 

어려운 가정 형편에 어머니께 용돈을 받아 쓰는게 너무 죄송했던 청년 황진은 스스로 돈을 번다는 게 정말 기뻤다. 

“첫 월급이 27만원으로 중위 월급이었어요. 제가 얻은 최초의 월급이었기에 외할머니의 교회에 헌금했죠.” 

환자가 정말 많았다. 장날인 1일과 6일의 경우 시장 거리처럼 붐볐다. 바쁘고 피곤했지만 환자들과 정겹게 교류한 소중한 시간이었다. 

6월 항쟁으로 거리마다 뜨거웠다. 군산시청이 이전할 즈음 군산의 가장 번화가였던 옛 시청 부근에 중앙치과를 개원했다. 1989년 5월 1일의 일이다.  

이 날부터 치과 의사 황진은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는 ‘군산 사람’이 되었다. 

“보건소에서 근무할 때에는 치료비가 싸서 그랬는지 환자들이 엄청 많았거든요. 그런데 개원하자 하루 열분도 안될 정도로 환자가 없는 거예요.” 

  

제가 ‘운동권’ 요? 걱정마세요, 불쾌하지 않습니다. 

 

군산에서 중앙 치과를 개원하던 시기는 전국이 민주화 운동 열기로 뜨거웠다. 전국적으로 여러 전문직 사회운동 단체들이 우후죽순처럼 창립되었다. 

그 즈음, 치과의사 사회운동단체로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 전북지부’ 회장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 운동을 주도했던 이들은 대부분 공보의였는데, ‘회장은 개업의가 맡아야 할 게 아니겠느냐’는 거였다.  

“개업한 지 몇 달 되지도 않았는데 어울리지 않는 자리라고 생각했어요. 또한 대학에서 학생 운동은 했으나 유급이나 제적을 무릅쓸 자신이 없어 거리를 두고 지냈던 자격지심도 있었고요.”  

당시 학생 운동을 주도했던 동료들은 정학, 유급은 물론 수감까지 당하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 

운동권이면서도 전력을 다하지 못했던 ‘부끄러움’ 비슷한 마음의 빚을 갚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초대 전북지부장을 3년을 했다. 

당시에 ‘군산·옥구 민주화운동협의회’, ‘민주주의 민족통일 군산·옥구연합’ 등의 단체에서 민주화에 헌신하시던 여러분들을 만났다. 

“저는 가끔 운동권이란 소리를 듣습니다. 운동권의 이력이 별로 없기에 저 스스로 운동권이라 생각한 적은 없으나 저를 ‘운동권’이라고 부르는 데 대해 불쾌하거나 불명예스럽게 생각하지는 않아요. 도리어 과분한 영광이라고까지 생각해요” 

치과 의사로써, 사회복지에 관심자로써, 기독청년회 회원으로써 살아 온 황진 원장의 철학은 ‘우리 사회 공동체가 모두 함께 잘 살도록 하자’는 것이다. 그가 사회운동의 연장으로 시도했던 현실정치의 꿈도 바로 다름 아닌 이것이었다.

  

나보다 힘든 사람들을 위한 길

 

민주화가 정착되면서 민주를 위하여 노력하던 운동단체가 참여자치 군산시민연대로 바뀌었다. 시대의 상황이 많이 변했기 때문이다.  

“저는 민주화 운동의 방식과 내용에 큰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제도적 민주화를 넘어서 그것의 심화와 확대가 필요한데, 그것은 민주의 핵심인 시민들의 삶의 질을 향상되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사회 운동과 의사로써 활동을 병행하였던 황진과 뜻을 함께하는 분들이 모여 시민연대 안에 환경보건위원회와 사회복지위원회로 모였다.  

이 위원들과 사회복지계 인사들이 협력하여 군산시 사회복지협의회의를 창립하였는데 그는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자연스럽게 복지현장의 목소리와 사회복지의 애로사항을 찾아 해소해주는 자원 봉사 활동으로 이어졌다. 사회복지와 자원봉사는 뗄 수없는 관계이며, 둘이면서 하나인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었다.  

치과 의사로써 해외 의료 자원 봉사도 했다. 캄보디아 프놈펜 외곽의 도시빈민 지역과 베트남 중부의 우리 청룡부대가 주둔했던 곳이었다. 

당시에 베트남의 젊은 치과의사들과 함께 했는데, 그들은 이역만리 타국에서 ‘이들이 왜 여기까지 와서 이러는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어둡고 무거운 심정으로 갔었는데요. 말하자면 인도주의 정신이나 어려운 이들을 향하여 손을 내미는 ‘희생’ 이런 것들을 이해하지 못하더라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보다 힘든 이들과 함께 하고싶은 마음의 길이 바로 치과의사 황진의 삶이 되었다.  

  

YMCA와 운동권, ‘둘이자 하나’ 

 

군산 사회에서 황진이라는 이름은 기독교 장로, 그리고 운동권 의사로 불려지고 있다. 또한 그는 80년대의 혼란기, 그리고 민주화를 향한 열망이 가득했던 시기에 분명히 거리의 한 복판에 동료들과 함께 서 있었다. 

운동권 정치인들의 위상이 과거보다 많이 퇴조한 오늘날 그와 같은 무명의 운동권은 살짝 칭찬받지 못하는 단어가 되어버렸다.  

“제가 신앙을 위해서 헌신한 것도, 운동권으로 희생한 것도 없기 때문에 면목이 없는 사람이지만 그 진실된 지향에 대해서 만큼은 이제는 말하고 자존을 지키고 싶습니다.”  지금은 운동권과 신앙인이 별로 자랑이 못되는 안타까운 시대이기에 말입니다.

 

그는 YMCA안에서 기독교와 운동권은 ‘둘이자 하나’  라고 했다. 

1991년도에 홍성YMCA 출신 유희영 총장과 인연을 맺어 Y운동을 시작하였고, 나중에 한국YMCA전국연맹 이사장을 맡기도 했다.  

“기독청년회와 같은 활동은 기독교 신앙인의 신앙고백의 한 방식이지요. 또한 필수불가결한 신앙 행위라고 믿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 신앙은 지극히 공허하거나 심지어 위선적인 일 수도 있지요.”  

세광교회 장로이기도 한 그는 예수님의 운동가적 측면이 그 분이 지닌 의미의 모든 면은 결코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한 공동체 현실속에서 이런 방식(운동권을 지칭)을 통하지 않고 외면해서 도달할 수 있는 복음에의 지름길은 거의 없다고 확신했다 

“신앙인이 현실의 삶 속에서 손과 발이 없이 머리와 입만 가진 인간(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은)처럼 산다는 것은 종교적 자기 만족이나 자아도취일 뿐이지 예수님의 복음적 신앙은 아닌 것 같습니다.” 

가치관의 혼돈 시대에 스스로를 던져 행동하고 낮은 자세로 세상을 살펴보는 이가 얼마나 될까. 가슴에 손을 얹게 만드는 그의 철학이 가슴을 울렸다. 


강단 있고 실천적인 인물.

 

아주 어렸을 때의 꿈은 큰 부자가 되는 일이었고, 나중에 정치의 가치에 대해 알게 된 후에는 여기에 대한 관심도 생겼다. 그러나 최종에는 역사학이나 신학을 공부하고 싶었다.  

개업하고 나서 기독교 대한 복음교회 총회신학교와 전주 한일장신대에 있던 동남아시아 신학대학원 한국지역 과정을 졸업하였다. 

지나놓고 보니 이 세가지는 인간다운 삶을 위해서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필수적인 관계 요소였다. 

 

개업을 한 후 그는 소개로 만난지 3개월만에 아내와 결혼했다.  그는 아내와 아이들 셋, 그리고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  

“흔히 필연적 인연을 말하곤 하는데 살아보니 인연은 처음부터 있는 게 아니고 살아가며 만들어가는 것 같아요. 서로 노력하여 만들어진 인연들과 함께 걷는 인생길이 꽃길이 아닐까요.” 

 지난 2019년 측근들도 예상하지 못했던 건강의 문제로 총선 경선 준비를 중도 포기했다. 중단 이후에 1년 이상 치과병원을 쉬어야 했다. 지금도 지역 대학병원에서 정기적인 검진을 받고 있으나 아직까지 큰 문제는 없다고 했다. 

“어렸을 때의 꿈 중에서 한 가지에만 집중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가끔 합니다. 지나놓고 뒤돌아보니 저는 그 꿈들을 동시에 지향해왔던 인생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모두가 아쉽습니다. 어렸을 때 할아버지께서는 가끔 ‘인생을 살아보니 농사를 몇 번 짓고 끝나더라. 한 가지만 목표로 해도 짧은 게 인생이다'는 그 말씀이 생각납니다.”  

 

그렇다, 어쩌면 그는 겉보기와 달리 강단 있고 실천적인 사람이다. 6년 동안 놓아주어 지혜를 갈고 닦았으니 한 단계 더 깊어진 내공으로 세상을 주유할 일만 남았다. 

  

내 인생의 전부,  ‘군산’  

 

성장기 이후에 황진에게 ‘군산은 모든 것’이었다. 20대 때 성산과 대야 보건소 근무 이래로 지금까지 오직 군산에서만 살았다.  

평생 얻은 경제적 수입은 모두 군산 시민들로부터였다. 그것은 갚아야 할 마음과 실제적인 빚이라고 했다.  

“다른 분들과 마찬가지로 군산은 제 인생의 전부입니다. 이러한 것에 대단히 감사하고 그 감사한 만큼 행복하고 군산을 사랑합니다.” 

군산이 많이 힘들다는 것은 저를 포함한 군산 전체의 일이라고 했다. 그 또한 전문직이기는 해도 자영업자이기에 몸으로 절실히 실감하고 있다.  

“제가 중앙로 부근에서 35년이 넘게 일을 하고 있지만, 지금은 건물에 저만 유일하게 입점해 있고 전부 비어있습니다. 이 건물만이 아닙니다. 거리의 가계들이 거의 전부 비어 있지요. 구도심도 그렇지만 다른 지역 상황도 비슷해져가고 있고요.”  

 

사회 문제와 관련한 여러가지 일을 하여왔기에 진단도 정확했다. 인구절벽 등 국가 차원의 문제와 대기업 유출 등의 지역 차원의 문제는 물론 지나친 수도권 집중과 지방 소멸성의 문제 등이 중첩되어 있다고 했다.  

“군산의 문제 또한 한 두가지의 특효적 해결책이 있다고 말한다면 정직하지 못한 일이지요. 다만 확실한 것은 그 해결책은 온 시민의 집단 지성적 지혜를 총화시켜서 최고의 방안을 찾아내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제도권 밖에서도 실질적 경험과 대단한 전문적 식견을 지니신 일명 재야의 고수들이 많이 있다고 했다. 제도권과 재야의 모든 시민 역량을 총동원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교회 다니는 사람으로써 덜 부끄럽게 책임 다할 터  

 

"평판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주위를 너무 의식하지는 않으려고 합니다. 피곤하고 불필요한 에너지 낭비지요. 자기 자신만이 갈 수 있는 고유하고 고귀한 인생길이 각자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최소한 욕 먹고 손가락질 당하며 살고 싶지는 않습니다.” 

명색이 교회 다니는 사람이라는 황진 원장.  

그는 예수 믿는 사람으로써 그 뜻 대로 사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 부끄럽지만, 내 삶의 근거와 가치 판단의 기준, 잣대를 적어도 거기에 두려고는 한다고 했다. 

  

(약력) 

원광대학교 치과대학 

기독교 대한 복음교회 총회 신학교 

동남아시아 신학대학원 한국지역과정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 전북 회장 

참여자치 군산시민연대 대표 

군산시 사회복지 협의회장 

군산 YMCA 이사장 

민주평화통일 자문회의 군산시협의회장, 상임위원 

한국 YMCA 전국연맹 이사장 

군산시 자원봉사센타 이사장 

더민주혁신회의 전북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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