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미술의 세 번째 주자는 ‘로마네스크 미술’이다.
‘중세’는 철학과 사상 모두 인간 중심의 예술을 구현한 ‘고대 그리스 로마’와 15세기 다시 인본주의 인간 중심의 문예 부흥을 일으켰던 ‘르네상스’의 시대로 돌아가기 전까지 로마와 르네상스의 사이에 있었던 시기였다.
중세 역사 속의 10~12세기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로마네스크’의 어원은 ‘고대 로마스러운’ 또는 ‘고대 로마를 닮은’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으며, 이 시기 역시 이 전 시간 칼럼에서 소개된 초기 기독교와 비잔틴 미술과 같이 예술, 경제, 정치를 통틀어 기독교 철학관의 신 중심적 힘이 지배적이었던 시기였다.
예술품으로 남겨진 건축, 조각, 회화들 역시 중세미술의 전반기와 별다르지 않다. 그리하여 이번 시간에는 로마네스크시기에 영향을 미친 역사적인 세 가지 사건과 건축과 조각에서 특별하게 발전된 두 가지 점을 살펴보고자 한다.
로마네스크 시기 가장 크게 주목될 사건은 카노사의 굴욕, 십자군 원정, 아비뇽 유수 이 세 가지이다. 이 사건들은 권력의 힘이 지배하는 방식과 경제와 인구 이동의 흐름에 따라서 예술 또한 그 흐름을 따라가게 된다.
먼저 첫 번째 사건 ‘카노사의 굴욕’(1077년)이다. 중세는 얌전하게 기독교가 국교로 공인 되었다기보다 교황과 세속 왕들의 대립이 계속되었던 시기였다. 서유럽의 교황은 땅과 재산을 비축함으로 백성을 다스릴 힘이 있었는데, 주교를 임명하는 ‘서임권’을 둘러싸고 일어난 싸움 이였다. ‘카노사’라는 지역에서 그레고리 7세라는 로마의 교황에게 서로마 황제 하인리히 4세가 1077년 1월 25일부터 3일간 파문을 철회해 달라며 애원하는 사건으로써 교황이 왕(독일)의 힘을 제지하며 교황이 왕을 굴복 시킨 사건 이였다.
두 번째 사건은 ‘십자군 원정’(1095~1492년)이다.
십자군 원정을 간략하게 핵심을 정리하자면, 이슬람으로부터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할 목적으로 유럽 카톨릭 세력이 중동지역의 예루살렘을 8차에 걸쳐 대략 400년간의 침략이 이루어진 원전 전쟁이다.
이 전쟁은 이슬람에 맞서며 성지 탈환이라는 공동의 목표가 있었지만, 실제적으로는 교황의 정치적 야욕과 영주들의 경제적 이해관계가 얽힌 현실적인 전쟁이었다. 각자 쟁취하려는 힘의 주권 세력을 통해 십자군 전쟁 초기에는 교황의 위세가 상승했으나 결국 원정 실패로 권위가 하락 했다고 한다. 토지를 소유했던 제후와 기마로 싸우던 기사의 힘 역시 몰락하며 자연스럽게 중세는 소멸로 이어졌고, 르네상스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 가르마가 된다.
400년간 8차의 전쟁을 치루는 과정에서 다양한 이동 경로를 따라 변화가 나타났다. 향료, 비단, 도자기 등 동양 산물들은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지중해 원거리 무역이 활발해져서 상공업 및 인근 도시가 발달하게 된다. 또한 전쟁으로 인한 접촉으로 비잔티움 문화와 이슬람 문화가 유입되기도 하였다.
이 긴 시간 동안 경로를 따라서 교회, 성당, 수도원들도 세워 졌으며, 미술 문화 역시 이 종교적 흐름을 타고 같이 이동 발전을 거듭 하게 된 것이다.
아비뇽 유수는 위의 ‘카노사의 굴욕’ 사건의 2차전이라고 볼 수 있다. ‘유수’란 유배를 보내서 가둔다는 뜻이다.
당시 프랑스의 왕 필립 4세가 당시 교회로부터 금전을 비축하고 싶어 했는데, 교황과의 마찰이 빚어지게 되었다. 이에 왕은 군대를 보내서 교황을 압제 하였는데 한달 뒤 교황은 죽게 되고, 이후 68년 동안 필립 4세 왕의 입맛에 맞는 7명의 프랑스인 교황을 즉위시키며 로마 교황청을 남프랑스로 이전한 사건이다. 이것은 카노사의 굴욕과는 반대로 왕이 교황을 제지 했던 사건 이였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이 있는 ‘로마네스크 미술’로 다시 돌아와 보자.
이 시기의 건축은 서유럽 전역에서 나타난 공통된 미술 양식으로 기독교적 중심의 건축이 발달 하였다. 같은 시기에 영국에서도 로마네스크 양식이 출현 하는데, 노르만족의 전파로 이루어졌다고 해서 ‘노르만 양식’이라고 한다.
‘로마네스크 양식’은 프랑스와 독일 전역의 교회와 성당들에서 나타나는데, 건축과 조각에서 발전된 두드러지는 두 가지 특징을 알아보자.
먼저 건축에서 발전된 점은 공간을 확장 시켰던 천정인 궁륭 형식의 재료가 바뀐 것이다. 비잔틴 시대의 목조 재료의 궁륭이 석조 천장으로 바뀌면서 건축 구조의 발전을 가져왔다. 거대하고 웅장한 크기의 묵직한 돌 무게를 버텨내기 위해 힘의 분산이 필요 했고, 그로인해 두꺼운 벽면과 기둥이 발달하며, 비잔틴 미술에 비해 절제된 장식과 소박한 건축으로 구조가 변화 되었다.
또 다른 변화는 초기 기독교미술 시기, 성화 사용이 허용된 것과는 대조적으로 우상 숭배의 문제 때문에 조각은 엄격히 금지되었지만, 로마네스크시기로 접어들면서 교회 출입구와 벽면이 형상 조각으로 장식되는 것이 허용 되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