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여름, 윤지원 작가는 딸과 함께 하루 나들이로 미지의 군산을 방문했다. 이성당 빵집을 들른 뒤 해망동 달동네 마을과 퇴락해가는 도시 곳곳의 모습들을 보았다. 그 쓸쓸한 모습들에서는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군산 만의 이야기가 숨어 있는 듯했다. 일제가 떠난 자리에 또다시 승전 강대국 미군들이 진주하는 질곡의 역사 도시, 전국 최초 3.5 독립만세운동의 발발지이면서 일제 잔재가 근대역사문화 관광상품이 된 이 도시를 보며 윤 작가의 감회는 복잡했다. 그녀는 그 느낌을 화폭에 담아 ‘귀로의 군산’이라는 주제로 서울 인사동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이후 2013년 광주 신세계백화점에서의 전시 역시 주제는 ‘군산’이었다. 그러다가 3년 전 그녀가 군산을 방문했던 날은 폭설이 내린 어느 겨울날이었다. 그녀는 곧바로 아파트를 계약했다. 동경하던 군산 정착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부산에서 태어나 초등 1학년 때 서울로 이주한 윤지원 작가는 미술 명문대인 H대학을 졸업한 뒤 이태리에 유학, 브레나 밀라노국립미술원 회화과 학사 및 석사와 Istituto Europro di Design Milano 일러스트레이션을 졸업했다. 이후 유럽에서 11년여 작가 생활을 거쳐 귀국한 그녀는 통산 개인전 25회와 단체전 14회 경력을 쌓을 정도로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으며 이번 군산에서의 전시회는 26회 째 개인전이다.
지난 2월 25일 전시 오프닝 행사에는 문단의 거목인 황석영 작가를 비롯하여 군산시 문화예술국장, 길 위의 사제로 알려진 문정현 신부, 군산문화재단 고보연 대표, 강용면 작가, 신석호 작가, 근대역사박물관장, 고려화방 최창환 대표 등 많은 축하객이 전시장을 메운 가운데 축사가 이어졌으며 파라디소 송성진 대표의 사회로 행사가 진행되었다.
오프닝 서두 마이크를 잡은 윤 작가는 인사말에서 “전시 기회를 주신 군산근대역사박물관과 귀한 발걸음으로 전시관을 찾아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고 운을 뗀 뒤 “군산이 가지고 있는 근대성은 제 작업의 주제인 기억과 잘 맞아서 어울리는 장소를 찾았다는 확신이 들었다. 작업의 주제는 역사 장소 기억 고독...등이고 작업 시 장소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 작업은 쉽게 풀린다. 그림 그리기는 사물을 다르게 보기에서 시작된다. 이번 전시는 하제마을 팽나무, 군산미군기지, 영화동, 제주알뜨르비행장, 그리고 예전 작업 3점을 포함해서 총 유화 22점”이라고 밝혔다.
또한 “누군가는 근대성이 진부하다거나 너무 오랫동안 화두로 삼아서 지루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제 의견은 다르다. 그 어떤 것도 해석하기에 따라서 동시대적이고 가장 앞선 문화가 될 수 있다. 해석은 예술가의 능력이고 문화의 힘이다. 어떻게 해석을 하느냐에 따라서 전혀 다른 것, 새로운 것으로 태어나서 충격을 준다. 전통적인 해석이 관습이라면 재해석은 작가의 주관적 새로움이다. 재해석은 또 다른 재해석을 탄생시킨다. 따라서 지역이 가지고 있는 특징을 그 상태로 두면 과거에 머물러 있지만 동시대적으로 해석하면 현재형으로 살아 있게 된다. 세상의 변화에 맞게 대응해 나가야 하고 그 능력이 예술가의 역할이다. 군산이 근대 유적이라는 자원을 바탕으로 예술이 다양하게 펼쳐질 수 있는 강한 문화도시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는 말로 인사말을 맺었다.
-전시 팜플렛에 실린 ‘기억’ 작가노트-(요약)
눈이 펑펑 내리는 날, 하제 팽나무를 향해서 천천히 운전을 했다. 함박눈이 흩날려서 앞을 보기도 어려웠고 천지가 눈으로 덮여서 길을 찾기도 쉽지 않았다. 저 멀리 눈 속에서 육백 년의 긴 세월을 견뎌낸 팽나무가 위엄 있게 서 있다. 그림은 작가가 고유의 능력으로 변화하고 대응하는 과정이다. 기억은 현재로 소환될 때마다 새롭게 해석된다.
군산은 근대의 기억들을 불러일으키는 도시다. 시간과 함께 쇠락해가는 흔적은 아름답고 어딘가 쓸쓸한 연민을 느끼게 한다. 그림은 과정이고 예술은 연민이다. 이번 전시 ‘기억’을 준비하면서 나는 군산이 지닌 근대의 기억들을 소환해서 동시대적으로 해석하려고 했다. 작가에게는 기존 틀에서 벗어나 새롭게 해석하려는 실험정신이 중요하다.
군산 미군기지 인근의 벌판에 서 있었는데 머리 위에서 여러 대의 전투기 연습비행이 진행되고 있었다. 가을 하늘은 높고 청명하지만 굉음으로 귀가 먹먹했다. 이것은 군산의 익숙한 현실이다. 오래된 건물이나 역사적 현장을 마주하면 그 장소가 내게 뭐라고 말을 걸 때도 있다. 나는 그 울림에 촉각을 세운다. 역사 속에서 핍박받고 익명화되어 존재 자체도 잊힌 많은 이를 상상해본다. 그리고 작업으로 해야 한다는 강한 의무감과 끌어당김이 있다.
‘봄을 기다리는’ 제호의 작품은 120호 3개 연작이다. 겨울은 가고 봄은 아직 오지 않은 어느날, 동백은 처연하게 떨어져서 주변을 붉게 물들였다. 거름 냄새가 심한 배추밭과 무밭, 진흙탕길을 지나니 우뚝 솟은 제주의 대정읍 알뜨르 비행장 격납고가 눈에 들어왔다. 일제 강점기의 흔적이다. 여기저기 흩어진 흙무더기가 예비검속으로 끌려가 처형된 장소라고 한다. 나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나는 방문한 장소의 사진을 찍고 작업실로 돌아와 그 영감을 캔버스에 옮긴다. 단순화한 최소한의 묘사, 과감한 구도, 수평과 수직 대각선으로 화면 전체를 만드는 직선의 구도다. 채도를 떨어뜨리고 대상은 선명하거나 흐리거나 지워서 흔적만 남기고 마치 무대장치처럼 현실에서 멀어지게 한다. 마음을 다한 그림이 감상자에게 새로운 환기를 불러일으키기를 기대해 본다.
<평론>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서’ –윤진섭-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풍경을 익숙하지 않은 풍경으로 전환시키는 윤지원 작가의 전략은 채도를 떨어뜨린 색채뿐만 아니라 다소 어눌해 보이는 화풍에 있다. (중략) 구도의 설정은 사실 작가의 감각과 재능, 그리고 거의 직관에 가까운 즉흥적 창의성에 기인하는 것인데, 윤지원은 화면을 다루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이 재능을 타고난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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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외 전시이력 : 개인전 26회, 단체전 15회
저서 : <한 정거장 전에 내려서 걸었다> 휴먼큐브
장미갤러리 전시 : 2025. 2. 25~4.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