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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역사사랑회’를 아시나요
글 : 오성렬(자유기고가) / poi3275@naver.com
2015.04.01 16:24:51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재미 쏠쏠, 공부 쏠쏠

‘군산역사사랑회’를 아시나요


 

지난 2013년 논의되어 작년부터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군산역사사랑회’(이하 ‘군역사’)는 관련 학자와 일반인들로 구성되어 군산 권역 곳곳에 숨은 선대 사회의 변천과 흥망성쇠의 과정을 더듬어 보고 그에 따른 사료적 의미를 찾아 우리지역을 바로 알아보자는 취지로 결성된 순수 민간 동호회이다. 불과 1년 남짓한 기간이지만 회원 수는 남녀 90여 명에 이를 만큼 활성화를 맞고 있는 이 모임은 직접 발로 뛰는 현장 탐방으로 심신의 건강도 챙기면서 공부가 된다는 점과 다양한 직업의 다양한 회원들을 사귀게 됨으로써 인간관계의 폭이 넓어진다는 것도 덤으로 얻는 즐거움 중 하나로 들고 있다. 모임의 회장인 정기문 군산대 교수는 로마사를 전공한 역사학자로 역시 사학자이자 문학박사인 중앙고 역사담당 김두헌 교사와 함께 ‘군역사’를 이끌고 있으며, 바다해설사로서 폭넓은 사회활동을 하고 있는 고대영 씨가 부회장으로 실무를 도맡아 모임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왼쪽부터 역사사랑회 부회장 고대영, 역사사랑회 회장 정기문 교수, 책임강사 김두헌 박사 

 

 

최근 우리 고장에 특히 주말을 맞아 근대역사를 탐방하려는 수천 명의 외지인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는 것도 가까운 선대가 겪었던 고난의 현장을 뒤돌아보고 그를 통하여 오늘날 우리 삶의 좌표로 삼는다는 교훈적 각성을 일깨운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 할 것이나 일개 관광 상품으로 전락해가는 감이 없지 않아 안타까운 감이 있고, 또한 우리지역엔 근대 역사 사료뿐만 아니고 수천 년 전 선사시대부터의 삶의 발자취가 곳곳에 배어있음에도 이를 제대로 발굴하지 못하거나 연구 사료가 미진하여 아쉽기도 하거니와 또한 설령 자료가 있다 해도 내용이 부실하거나 어려워 쉽게 접하기도 힘들고 제대로 조명을 받지 못하고 있던 차에 결성된 ‘군역사’는 누구나 참여하여 현장 탐방 스토리텔링으로 지역사를 더듬어볼 수 있다는 점에서 나름의 의미와 기대를 갖게 한다.

 

‘군역사’는 결성 초기인 2014년도 첫 탐방지로 신시도를 비롯해서 대야의 탑동마을 3층 석탑, 골샘약수터와 대문장가 죽봉 선생 묘소와 함께 최치원 선생 탄생 설화가 깃든 내초도의 금동시굴 등을 돌아봤고, 올해 들어 1월에 은파 주변 경주 이 씨 재각(齋閣)과 비석, 비문을 둘러보고 이를 해독하는 법과 가문에 얽힌 이야기를 공부했으며 지난 3월 14일 행사는 나포에 있는 공주산과 입점리 고분 등을 탐사했는데 모임의 책임강사인 김두헌 교사의 해박한 지식과 거침없는 입담의 설명은 시간 가는 줄 모를 만큼 재미와 함께 참석자 모두의 학구적 갈등도 채워줘 박수를 받기도 했다. 실제로 김두헌 교사는 특히 한국의 가문과 족보 관련하여 탁월한 연구 업적으로 굴지의 학자로 인정받음으로써 지난해 ‘전국문화원연합회’가 주관하는 논문심사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는가 하면 ‘국사편찬연구소’에서도 연구비를 지원받고 있을 만큼 실력이 입증된 사학자이기도 하다. 그에 따르면 군산, 옥구 지역에만도 약 88개의 가문이 형성되어 있어 향후 이에 대해 차근차근 회원들과 같이 공부해보는 시간도 가질 예정이라며 이와 관련 특히 족보에 대한 상세한 해설도 곁들이겠다는 말로 기대를 주기도 한다.

 

 

3월 14일 필자도 같이한 나포지역 탐방은 쾌청한 날씨에 약 20여 명의 회원이 참여하여 시종 즐거운 분위기의 일정이었다. 이 날의 첫 탐방지인 공주산(公主山/65m)은 강가에 마치 밥사발을 엎어놓은 듯 아담하면서도 소나무 우거진 동그란 형상의 산으로서 필자도 가끔 그 길을 지나다녔으면서도 전혀 내력을 알지 못했던 곳이었다. 김두헌 강사로부터 산 아래 벽파정(碧波亭)과 주변 비석들에 얽힌 간단한 설명을 듣고 산에 오르니 정상의 정자에서 내려다보이는 금강과 서해바다가 봄 햇살 아래 비단을 펼쳐놓은 듯 유려하다. 김두헌 강사에 따르면 공주산은 고조선의 마지막 왕인 준왕이 위만에게 패한 후 세력을 이끌고 남으로 내려와 단군조선의 맥을 이을 국가 터를 잡고자 이 일대를 지나던 중 공주가 중병에 걸려 돌봐줄 신하들과 함께 이곳에 남겨두고 익산과의 경계인 어래산을 넘었는데 후일 익산 지역을 중심권으로 하는 마한(馬韓)의 왕이 된 뒤 공주를 데려가기 위해 다시 왔다는 설이 있어 이후로 이 산을 공주산이라 부르게 되었고, 준왕이 넘었던 산은 임금이 찾아온 산이라 하여 어래산(御來山)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한다. 하지만 공주의 태(胎)가 묻혀 있어 공주산이라 한다는 설, 이 산이 본래 충남 공주에 있던 산인데 홍수 때 떠내려 왔기 때문에 공주산이라 한다는 설 등 믿기지도 않고 근거도 부족한 이야기들도 전해지고 있다.

 

 

공주산을 답사한 뒤 일행은 나포파출소 앞의 식당에서 꿀맛 같은 점심을 먹고 입점리 고분을 향해 출발했다. 입점리는 익산시 웅포면에 속한 고을로서 나포면 수철리에서 어래산과 이어진 산 고개를 넘어야 되는데, 수철리 마을의 수호신인 듯 길가에 우뚝한 수령 약 150여 년의 당산나무 아래에서 김두헌 강사의 설명으로 잠시 마을의 내력에 대해 살펴보는 시간을 가지기도 했다. 마을 주민으로서 교원 퇴직 후 양봉을 하고 있다는 김남진 씨에 따르면 당산나무는 본래 20여 그루였으나 해방 후 면사무소 신축 때 거의 베어내고 그나마 남아있던 것도 주민의 실화로 불에 타는 등 다 없어지는 바람에 지금의 한 그루만 남았다며 앞으로 나무 아래쪽에 나그네가 편히 쉬어갈 수 있도록 자연석을 설치할 생각이라는 말과 함께 이 동네 땅에서 덩이쇠가 많이 나와 수철리(水鐵里)라는 지명이 붙었다는 말도 들려준다. 철(鐵)앞에 물 수(水)자가 붙은 것으로 보아 철이 매장된 일대의 토질이 습(濕)했던 것으로 추정되나 정확한 연유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또한 주변에 기와를 구웠다는 와촌(瓦村)마을, 임금이 책을 읽었다는 서지(書知)마을의 유래가 전하며 어래산에도 본래 산성이 있었지만 지금은 소멸된 잔해만이 한 때 산성이 있었음을 짐작케 해줄 뿐이고 입점리로 넘어가는 고갯길도 본래는 산자락이었으나 철을 채굴하면서 산자락이 몽땅 사라져 자연스레 고개와 평지로 변했다는 것인데 실제로 불과 몇 십 년 전만 해도 쟁기질을 하다가 쟁기 날이 쇠에 부딪쳐 부러지는 일도 있었다 하니 이로 볼 때도 본래부터 철성분이 많이 매장된 지역임이 확인되고 있다.

 

고개를 넘으니 입점리라는 표지판과 함께 왼쪽으로 고분전시관이 잘 건축되어 있고 뒤쪽의 산자락 일대는 수십 기의 고분이 잘 조성된 잔디와 함께 고즈넉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마침 날씨도 쾌청하여 일행은 스펀지같은 잔디를 밟으며 산에 올라 일대를 돌아보면서 김두헌 강사의 설명에 빠져들기도 했는데, 이 고분은 1986년도 칡뿌리를 캐던 어느 고등학생에 의해 우연히 발견 되었다 한다. 백제의 왕족이나 토호 세력가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이러한 집단 고분군이 어떻게 1,500년 이상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가 최근에야, 그것도 참으로 우연히 발견 되게 된 것인지 의문도 들지만 이후 문화재청에서 본격적으로 발굴했을 때는 이미 상당수의 부장품들이 거의 도굴된 상태였다 하니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다. 하지만 금동 관이나 신발, 도검, 귀고리와 목걸이, 항아리와 그릇 류 등 일부 남아 있던 것들이 수습되어 전시관에 진열되고 있고, 고인돌이나 고분 내부도 형태별로 실제와 똑 같이 복원하여 일반인이 쉽게 관찰할 수 있도록 해 놓은 것은 그나마 다행스런 일이라 할 만하다.

 

햇볕 따사로운 산자락 고분 군 잔디에 앉아 쉬던 일행은 회원으로서 개야도 주민인 임봉택 씨로부터 과거 그가 청년이었던 1972년 3공 군사정부 시절 억울하게 간첩누명을 쓰고 겪었던 옛 이야기를 듣기도 했는데, 그에 따르면 마을에 납북했던 어부가 있었고 그 어부가 북에서 내려온 후 기관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못 이겨 북에서 가지고 내려온 서적 한권을 자신에게 주었다고 거짓 진술하는 바람에 자신은 영문도 모른 채 경찰에 잡혀 가 허위자백을 강요당하며 인간으로서는 겪을 수 없는 온갖 고문을 당했던 사연이다. 그 일로 1년간 옥살이도 하고 나왔다는 그는 실제로 엄지손가락 뼈마디들이 고희의 나이인 지금도 비틀려 있어 당시 그가 겪었을 고통이 짐작이 되기도 했다. 그는 최근 재심을 통하여 무죄판결로 명예회복을 찾고 국가로부터 소정의 배상금도 받았다는데 말도 안 되는 억지 조작으로 한 인간의 삶을 송두리째 짓밟아 놓고 이제 와서 배상금 몇 푼 준 들 그게 무슨 소용일까 하는 생각도 들었으나 그는 현재 인권단체인 ‘진실의 힘’이라는 모임에 들어 같은 아픔을 가진 사람들의 연대를 통한 사회적 활동에도 열심이다. 이것은 한 사람의 개인사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살아왔던 암울했던 어느 한 시대의 이야기와도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라서 공감을 갖는 사람도 많았을 것으로 느껴진다.

 

이날의 탐방은 지역사 모색을 통한 공부와 함께 자연스레 수천 년 전 과거로 되돌아가 잠시 무한한 상상의 나래를 펴게 된 시간이기도 했으니, 예컨대 단군왕검인 고조선을 끝내 계승하지 못하고 한때 군신관계였던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긴 채 비통한 심정으로 뱃길 따라 남으로 내려올 당시의 준왕의 처연했을 모습, 입점리 경사진 산자락에 고인돌을 비롯하여 수십 기의 왕족 무덤을 짓느라 동원된 대규모 인부들이 바위와 돌을 운반하고 여러 가지 돌방 무덤형태와 부장품을 선별하느라 땀방울을 닦으며 바삐 오르내렸을 당시 백제인 들의 모습이 그렇다.

 

산위에서 내려다보이는 금강은 새삼 더욱 많은 상념을 던져준다. 장수군 뜬봉샘에서 발원하여 장장 400Km를 달려 내려온 유장한 물길. 그 강을 전장 터 삼아 당나라와의 사이에 벌어졌던 백강(백천강,백촌강)전투, 기벌포 전투를 비롯해서 왜구를 물리친 최무선의 진포대첩까지 피와 땀으로 강물을 적시며 이 땅을 지켜낸 조상들의 옹골찬 함성과 거친 숨소리가 들리는 듯도 하다. 하지만 지금은 족쇄처럼 하굿둑으로 도도한 물길이 막혀 강이 아닌 호수로 변하고 말았다. 온갖 생명과 역사를 품은 금강. 견뎌낸 아픔이 많아 탁류가 된 것일까. 그 강은 오늘도 본능적으로 멀리 서해로 흐르고 싶어 한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물이다. 승자의 변명 서라 말하는 이도 있다. 같은 사건을 두고도 시각과 입장에 따라 자기중심적으로 합리화한 주관적 규정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사로 기록된 많은 사료들에서도 때로 모순이 드러나고 학자들 사이에서도 이견이 비일비재하다. 역사의 왜곡이나 오류는 고대사에만 있는 게 아니다. 현대사는 더 심할지 모른다. 기록되지 못하는 패자의 진실, 그래서 입과 입으로 전해지는 야사에 더 무게를 두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승자의 기록물 앞에서 균형적 시각으로 진실을 들여다보려는 자세는 양식 있는 모든 이들의 몫으로 남고 있다. ‘군역사’를 통해 그러한 부분들이 조금이나마 채워질 수 있다면 큰 보람으로 남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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