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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피아니스트 이권희 : 제4화 .황소와 동요
글 : 이권희 /
2019.08.01 15:32:36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제4화 .황소와 동요 



 

우리 동네에는 집집마다 소. 닭. 토끼, 강아지 등등의 가축들을 기르는 집들이 많았다.  우리집에도 소가 두 마리 정도는 늘 길러졌다. 

 

지금 생각해 보면 가축들을 잘 길러 장에 내다 팔아 돈을 만드는 것이 어른들의 궁극적인 목적 이었겠지만 농사를 주로 짓던 그 때는 소들은 다른 가축들과는 조금 다른 의미였고 가축이라 보다는 거의 가족 같은 존재로 귀한 대접을 받았다.  

 

부모님들께서는 아침에 농사일로  논밭으로 나가실 때 우리들한테 학교에 갔다 돌아 오면 소들의 식사시간을 엄수 하도록 몇 번이고 다짐받는 게 일쑤였다. 그래도 막상 학교 갔다 오면 노는데 정신이 팔려 집에 가방만 던져놓고 뛰쳐나가 실컷 놀다가 뒤늦게 “아차!“하고 집에 와보면 소들이 배가 얼마나 고팠는지 앞에 놓여진 여물통을 핥고 또 핥아서 윤기가 반들반들 하게 되어있기도 했다. 

 

뒤늦게 소죽을 퍼주면 소들은 나를 고마운 듯 야속한 듯 야릇한 표정으로 쳐다보면서 정신없이 먹어치웠다. 

 

막내인 나는 동생이 없었기에 덩치 큰 소가 동생처럼 여겨졌기에 울적하기나 심심할땐 소와 대화를 하며 때론 위로를 받기도 하는 친구 같았으나 말 못하는 소 앞에는 내가 일방적인 대장이기도 했다..(ㅎㅎ) 

 

날씨가 좋은 날엔 소를 몰고 들판에 풀밭으로 몰고 가서 자유롭게 풀을 맘껏 뜯어 먹도록 놓아주기도 했다. 소들은 맛있는 풀을 찾아 자유로이 배를 채우고 나면 돌아올 땐 배가 불러 인심이 넉넉해진 터라 언덕배기에서 등위에 살짝 올라타면 짜증도 안내고 꼬리를 한 바퀴 돌리면서 어슬렁어슬렁 마을 입구까지 나를 재밌게 태워주기도 했다.

 


 

 

그 황소등에타고 올 때의 기분은 세상에서 제일 근사한 자동차 탄 것 보다 더 재밌고 편안 했던 것 같다. 

 

마을에 유난히 장난기가 많고 명물이었던 형이 있었다. 

 

그 형은 소를 말로 착각할 정도로 소등에 앉으면 경마 선수처럼 돌변해서 마을에서도 소를 타고 동네를 뛰며 돌아다니는 괴짜 형이었다. 어린 우리들 눈엔 대단한 담력을 가진 전쟁 영웅 같은, 이름난 장수처럼 대단하게 보였다. 지금 생각해도 발판이나 손잡이 등의 안전장치도 없었는데 어찌 그렇게 잘 타고 달렸는지 신기하다.

 

하루는 소를 들판에 풀을 뜯어 먹게 한 뒤 잠시 틈을 타서 산 속에 숲이 우거진 곳에 들어가서 정신없이 산열매를 따먹고 있는데 갑자기 소낙비가 쏟아지기에 허겁지겁 달려 가보니 소들이 어디론가 가버리고 없었다. 우리들은 순간 얼굴이 벌게지면서 “야!.. 큰일났데이.. 아버지한테 맞아 죽었다 인자...우짜노...”하고 주위를 한참 찾아 헤매다가 마을로 뛰어가서 동네 아저씨들 한테 “소가 없어졌니더~~!“ 하니 아저씨들께서”집에 얼릉 가보거래이~”하고 껄껄 웃으셨다.

 


 

 

헐레벌떡 집으로 와보니“ 이게 왠일인가?“ 소가 느긋하게 여물을 먹고 있는 게 아닌가.. 어찌된 거냐고 엄마한테 여쭈니 ”소가 혼자서 정신없이 뛰어 들어 오더라“고 하셨다. 휴~~~~

 

아마 천둥치며 소나기가 쏟아지니 소들이 깜짝 놀라 본능적으로 집을 찾아 뛰어온 것 같았다. 그 일을 겪은 후로 소가 대단히 영리 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여름철이 되면 더위에 지쳐 소들도 뜨거운 쇠죽을 피하고 싱싱한 풀 위에 사료를 버물려 생식(우리가 먹는 일종의 샐러드스타일^^)으로 먹었기에 소 풀을 베러 산으로 들판으로 다니는 것이 일이자 놀이 문화였다.

 

풀을 베다가 배가 출출하면 집에서 뭔가 챙겨 가지 않더라도 산에는 온갖 종류의 간식들이 있었다. 그 중에 별미가 소나무의 줄기를 잘라서 겉에 거친 부분을 제거하고 입으로 껍질을 뜯어 씹으면 소나무에서 단물이 나와 씹으면 맛있어서 배를 채우기도 했다.

 

이것을 “송기”라 불렀다.  

 

애들 중에는 유난히 단물이 많고 맛있는 송기를 잘 찾아내는 애도 있었고 둔한 애들은 늘 마른 쭉정이를 뜯어먹곤 했다. 그때는 단맛이 귀할 때라 ”송기“는 우리의 입을 즐겁게 해주는 최고의 간식 이었고 동생들, 누나들. 줄려고 몇 개씩 챙겨 담아 오기도 했다 .

 

어느 여름방학 때 일이었다. 

 

마을 어귀 동산에서 전쟁놀이 하며 노는데 음악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여지없이 내 귀는 당나귀 귀처럼 쫑긋해 지고 나는 그 소리에 이끌려 소리를 따라가 보았다. 근방에 가보니 벌써 많은 애들이 둘러 앉아 맛있는 과자도 먹어가면서 깔깔대며 즐겁게 모여 놀고  있었다. 

 

앞에서 진행 하는 누나도 예뻤다. 우리처럼 시골에서 살지 않고 도시에서 온 여자가 분명했다. 그런데 그 누나가 조금 후에 부르는 노래라는 것이 흡사 귀신이 나올듯한 고음으로 생전 처음 들어 보는 노래를 불렀다.

 

창도 아니고 가요도 아니고 노래도 이상하고 표정도 이상하고 입도 크게 벌리고 심지어 웃기기까지 했다.

 

하지만 들을수록 신기하고 묘한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코를 찔찔 흘리며 얼굴도 꼬질꼬질한 시골 아이의 눈에 비친 도시에서 온 그 누나의 노래는 그림 속 에서나 볼 수 있는 천사의 목소리가 이렇지 않을까 싶기 까지 했다.

 

한참 후에야 그 노래 창법이 성악 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선교 단체에서 전도차 우리 동네를 들른 거였다.

 

아랫동네 아이들과 우리 동네 애들은 학교에서도 듣도 보도 못한 동요와 율동을 배우기도 했다 . 처음 해보는 동작이라 쑥스러워 깔깔대기도 하며 재밌게 따라하고 놀다보니 형들이 여러 가지 맛있는 과자와 음료수를 나누어 주기도 하였는데 그때에 초코렛이라는 것도 처음 먹어봤다. 

 

쓴맛이면서도 달콤한 맛이 있어 얼굴 표정을 찡그려 가면서도 맛있게 먹곤 했다. 그날  집으로 돌아와서도 혼자서 콧노래로 흥얼흥얼하면서 낮에 배운 것을 몰래몰래 해 보고 내일은 꼭 예쁜 그 누나한테 칭찬을 받길, 꼭 내 머릴 쓰다듬어 주길 고대하며 잠이 들었다.

 

그러나 이튿날부터 아무리 기다려도 아무도 오지 않았다.

 

그 짧은 경험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었다.  또 올까 포기가 되지 않았지만 그 후론 두 번 다시 그 누나나 형들을 볼 수 없었다.

 

지금도 그때 배운 동요가 아직 까지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시냇물은 졸졸 졸졸~~~ 고기들은 왔다 갔다~~~ 버들가지 한들한들~~ 꾀꼬리는 꾀꼴 꾀꼴”

 

오페라 아리아를 들을 때에도 그 예쁘던 누나가 생각 나는데.. 그 때 그 분들은 다니던 수많은 동네의 어디서나 흔하던 꼬마였던 나를 기억도 못하시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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