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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데로 낮은 데로, ‘성광교회’
글 : 채명룡 /
2019.07.01 18:47:46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낮은 데로 낮은 데로, ‘성광교회’ 


- 7월 13일, 교회 설립 67주년 

- 2번의 교회 분립, 위기에서 다시 일어서다. 

- 초보의 고민, ‘아직 나는 시계추’



 


 

 

오늘도 주일 2부 예배를 드렸다. 7월 새벽기도회가 시작되었다. 목사님은 ‘이번 한 번만 나오라’고 하지만 나는 영 자신이 없다. 이번엔 나갈 수 있을까 고민하지만 아직 안될 것 같은 생각이 앞선다.

 

나는 교회를 잘 모른다. 말하자면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초보이다. 아직 교인이라고 할 수도 없으며, 믿음도 빈약할 수밖에 없다. 시계추처럼 매주일 왔다 갔다 하면서 예배를 드리는 게 교회 생활의 전부이다. 

 


 

 

성광교회와의 인연은 지난 2017년 12월 24일이다. 크리스마스 전날 난 김민재 장로님과의 동행을 결심했다. 신문사 일로 이런저런 상의를 많이 했지만 언젠가부터 마음 한쪽이 허전했다. ‘이 느낌이 뭘까’ 한 동안 고민했던 일이다.

 

그 해 겨울, 교회에서 주는 가장 큰 상이 ‘전도상’이라는 장로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이제 내가 선택해야 하는 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또한 신의 섭리일거라 믿기로 했다. 

 

그 전에 나는 발바닥 신자이지만 가끔 성당에 다녔다. 누가 물어보기라도 하면 기꺼이 ‘천주교 신자’라고 대답했다. 아들과 딸도 아빠 따라 성당에 다녔으니 내 책임이 크다. 아직 가족들은 교회에 나오지 않는다. 묵은 숙제를 언제 풀 것인가 고민이 많다.

 


 

 

내 가슴 속에 하나님을, 예수님을 채워 놓지 못한 것 같다. 세례교인으로써 죄송하다. 예전 성당에 갈 때도 막연했지만 오늘 교회에서도 그 느낌은 비슷하다. 

 

천주교와 기독교는 왜 이질적인 관계가 되었는가. 물론 가톨릭의 ‘면죄부’로 인한 폐해와 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난 정도는 배워서 안다. 그러나 이론적으로 조금 알뿐 믿음에서의 그 관계는 잘 모른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나에게 기독교란 가지 않은 길이다. 처음으로 새신자석에 앉은 그 날, 차상영 담임목사님께서 이름을 불렀을 때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몰랐다. 주목 받는다는 것, 그 시선만큼 어께가 무거워 질 거라는 건 알려주지 않아도 안다. 낯선 경험이었다.

 


 

 

누구나 첫 인상이 중요하다. 성광교회와 짧은 만남의 시간이었지만 가장 굵은 끈은 차 목사님에 대한 느낌 아닐까 싶다. 물론 나만의 일방적인 생각이지만 인연이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리라.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 좀 졸립다. 왜냐면 이스라엘의 역사와 세계사의 한 부분을 넘나드는, 말하자면 잘 알아듣지 못하는 이야기들이 많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목사님은 적절한 현실적 비유와 애교(?)를 섞어가면서 졸릴 기회를 주지 않는다. 다른 목사님들의 설교를 들은 적이 없으니 비교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내 귀에는 맞춤형 이었다.

 

지중해의 서쪽 지역을 설명하면서(지도는 지도인데....)  ‘돼지 족발에 삼지창’을 휙휙 그려놓고 예루살렘과 갈릴리, 요단강 등등 지명을 설명할 때가 가장 압권이었다. 

 


 

 

다른 분들은 어렵게 들었을지 모르지만 그 당시 로마와 세계의 역사가 어땠는지를 설명하는 말들이 나의 귀에는 쏙쏙 들어왔다. 언론사에서 잠깐 벗어나 학생들에게 세계사를 통하여 논술을 가르치던 일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렇구나. 성경의 말씀이 이스라엘의 역사와 이어지고, 그건 세계의 역사와 일맥상통하는 살아 있는 이야기구나 생각했다. 아는 이야기들이 나오면 속으로 맞장구도 치고 하니깐 자연스레 얼굴이 밝아졌다. 내 옆을 지키던 장로님 사모님도 편해졌으리라고 짐작된다.

 

그리고 1년이 지났고 나는 2019년 4월 21일 부활주일에 세례를 받았다. 성광교회의 일원이 되었다. 그러나 아직 낯설다. 내 집같이 여겨지지 않는다. 언제 쯤 나는 이 낯설음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교회의 타락과 기독교가 위기라는 말을 여러 경로를 통하여 듣고 있다. 우리 교회도 그럴까 생각해보기도 한다. 잘은 모르지만 하나님의 섭리가 이 안에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 혼란스런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기로 했다. 나 혼자의 믿음 생활도 똑바로 못하면서 무슨 귀동냥인가. 해찰 하지 않고 쭉 걸어가야 할 일이다.

 

성광교회는 군산에서는 교세가 크기로 손꼽힌다. 그러나 세광교회, 한일교회가 분리되어 나가면서 아픔을 겪었다고 한다. 어딘들 시련 없는 과정이 있을까. 

 

‘성광교회 60년사’를 읽으면서 이런 아픔이 있었다는 데 놀랐다. 그러나 역사는 기록이며 그것은 숨길 수 없다. 그런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일까? 성광교회는 교회를 개척하는 데 남다른 열정을 가졌으며 기도를 많이 하는 교회로 자리 잡았다고 한다. 

 

어려운 교회들을 돕는 데 인색하지 않다. 국내와 해외 선교에 힘쓰는 건 말할 것도 없다. 다른 교회를 잘 모르면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조금은 우습지만 성광교회 역사를 기록한 책에 그렇게 나와 있으니 믿는 거고, 또  장로님들이 그렇다고 하니까 나 또한 그렇다고 할 수밖에.

 

차상영 담임목사님은 2015년 9월부터 시무를 시작했다. 다른 교회에서는 어떻게 하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성광! 살림의 꽃을 피우자”라는 구호를 외치고 예배를 마무리 한다.   

 

“나로 인하여 살리오(요6:57)”라는 예수님 말씀 따라 살림꾼 예수를 닮아 가고자 하는 다짐이다. 예수가 들어가면 개인이 살고, 가정이 살고, 지역이 살고, 나라도 살며, 나아가 온 열방이 살아나게 된다는 ‘살림의 비전’이다. 

 

지금의 교회 건물을 다시 지을 때 성전건축위원장을 맡았던 서순철 장로님은 성광교회 60년사에서 “온갖 죄악이 난무하였던 유흥주점(택사스촌) 있는 곳에 우리의 새싹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찬양하는 거룩한 교회가 만들어졌다.”고 회고했다. 

 

‘낮은 데로 임하소서’를 외치지 않더라도 교회가 가야할 길을 성광교회는 오늘의 현실로 보여준 셈이다. 

 

하고 많은 교회가 있지만 나는 성광교인이다. 1년 갗 지난 초보여서인지 똑바로 걸으려고 노력하지만 여전히 헷갈리지만 오늘도 ‘살림의 꽃’을 외쳤다. 그게 뭘까 궁금하지만 교회 공동체가 함께 낮은 데로 발걸음을 놓기에 따라가는 건 무조건이다. 

 

성광교회는 1952년 군산유치원 교실에서 처음 예배를 드렸다. 7월 13일은 67주년 맞는 교회 생일이다. 그날이 왔다. 

 

 

 

군산성광교회(한국기독교 장로회)

군산시 중정길(개복동)39

(063)445-4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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