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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운 영혼을 꿈꾸는 빛의 작가 채 억
글 : 이진우 /
2018.08.01 14:46:18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자유로운 영혼을 꿈꾸는 빛의 작가 채 억

 


 

40대 중반 화단을 떠났던 화가 채수억, 그가 다시 캔버스의 세계로 돌아온 지 10년이 지났다. 군산 예술계의 뿌리인 대한민국 2호 사진작가 채원석 선생을 아버지로 둔 그. 그래서일까, 그의 작품에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자 막중했던 책임감이 짙게 배어 있었다.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았으니 정직하고 성실한 건 당연하게 보였다. 그러나 그의 내면에는 이 틀을 벗어나 끼와 열정으로 일탈하고도 싶기도 했으리라. 그러나 그의 그림처럼. 그는 늘 단정했다.

생활이라는 핑계를 대고 그는 몇 년의 외도를 시도했다.

작가 정신이 투철한 아버지였어요. 항상 카메라를 메고 작업을 하고, 암실에서 일을 하던 모습이었지요. 아버지 후광을 입기도 했지만, 어느 땐 그 그늘의 크기에 비해 자신이 왜소하기만 하드라고요.”

하지만 그는 그림을 하고 싶었다. 금강 하구둑에 앉아 때로는 갈매기가 되거나 노을이 되어, 아니면 섬처럼 외로운 배가 되어 캔버스 속으로 뛰어들고 싶었다.

화실을 내달리는 꿈을 꾸기도 했고, 강변에서 남몰래 눈물도 흘렸습니다. 후회스런 날들이 지났는데, 어느 날 플라타너스에서 새순이 돋는 모습이 제 자신처럼 보이는 거예요.”

정말 우연처럼 자화상이 그려졌다. 그는 용기를 내서 도심 속의 자화상’30여점을 그렸다.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굴비등 음식 연작에서부터 악보와 꽃으로 상징되는 빛의 환희를 그렸다. 그리고 10년이 흘렀다.

2015년 즈음부터 보석에 빛이 반응하여 변화하는 과정을 주목했다. 빛과 스펙트럼을 통해 꿈의 세계에 다다르는 영역을 비구상과 반구상의 형태로 내놓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단순화의 과정을 거쳐 어느 한 부분이 클로즈업 되는 상상의 세계를 찾아 나섰다. 그는 오늘도 변화하는 빛을 좇아 새로운 길을 찾아가고 있다.

 


 

 

아버지는 내 예술의 원천

 

어릴 때 사진 작업을 하던 아버지의 암실에서부터 빛에 대한 자유로운 상상을 했던 채수억 화가. 백지 위에 떨어지는 햇볕에도 색깔이 있다는 걸 알기 까지 긴 시간이 필요했다.

아버지가 저에게 물었죠. ‘흰종이 위에 분홍색이 보이지 않냐? 하늘색도 있고 연두색도 비칠텐데...’ 저는 이리저리 둘러보아도 보이지 않아 안 보이는 데요.’라고 건성으로 대답했죠. 그런데 어느 날 하얀 종이를 무심코 바라보다가 색이 나타나는 걸 발견한 거예요.”

어릴 때 아버지가 던져 준 화두를 풀게 된 아들은 그 때부터 빛의 스펙트럼과 보석 작품을 그리게 되었다. 찰나의 예술 속에서 피어났던 영혼의 색감들을 그는 기억했다. 그리고 오늘 그 빛의 속도와 변화와 새로운 탄생을 그리고 있다.

그의 아버지 고 채원석 선생은 대한민국 사진예술 1세대이다 일제 강점기 군산을 본거지로 한국 사진계를 열어갔다. 그분은 철저하게 사진 예술에만 매달렸다. 채수억이 화가가 된 까닭은 아버지를 보면서 예술의 기초를 익혔기 때문 아니었을까.

아버지는 방에 도배를 해놓고 크레파스를 사주시면서 무엇이든 그리라고 했지요. 어릴 때 이것저것 그려서 어지럽게 되면 그 위를 또 도배해 주시곤 했습니다. 말하자면 안방 벽이 저의 캔버스였던 셈이지요.”

분야만 달랐지 아버지가 지나왔던 예술 세계의 그늘은 너무나 깊고 넓어서 아들이 감당하기 어려웠다.

혼란을 겪었던 그는 스스로를 단련하는 과정이 지나서 다시 그림을 그렸고, 예술인이라면 누구나 도전해보고 싶은 분야인 빛을 작품으로 만드는 데에 매달리고 있다.

 

혼란기를 넘어 그림에 정착하다

 

“6살 때부터로 기억되는데, 아버지의 암실에 들어가 사진이 나오는 걸 지켜보곤 했었어요. 녹색 빛은 필름 현상, 빨간 빛은 인화할 때 쓴다는 걸 그 때 알았지요.”

사진작가 아버지를 둔 덕분에 그는 초감각의 세계를 어릴 때부터 익혔다. 암실에서 빛의 가감과 시간의 차이에 따라 어둡고 밝아지는 세계를 경험한 것이다.

아버지는 암실에서 사진의 어둡고 밝은 부분을 교정하기 위해서 손바닥을 이용해 빛을 주거나 빼곤 했거든요. 아버지는 감각으로 저는 초시계로 쟀는데 한 번도 틀리는 일이 없었어요. 기가 막힌 감각을 물려주려고 연습을 많이 시켰던 게지요.”

어린 채수억이 전문적인 미술수업을 받은 건 최예태 선생이 운영하던 군산우체국 옆 가야미술연구소에서였다. 군중을 거쳐 군산상고에 특기생으로 들어갔던 그는 2학년 때 미술선생 문복철 선생이 운영하였던 무아화실을 다녔다.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고 방황하던 그는 상고를 졸업한 뒤에 선배의 화실을 다니면서 마음을 다잡고 늦게 전주대학교 미대에 들어갔다.

그림을 시작할 때는 주로 수채화를 많이 그렸는데, 점점 유화의 매력에 빠지게 되더라고요.”

대학에서 동양화와 서양화, 조소 등을 두루 경함한 그는 서양화에 정착했다. 지금까지 유화를 한지 40 여년이다.

 





서양화, 그것은 나의 운명

 

전업 작가를 했지만 2000년도가 시작되면서 아내와 함께 아이들 끼니는 거르지 말자고 험한 일을 했다. 그 세월만 6년이다. 다시 그림을 그리기 까지는 어려운 과정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림에 대한 그리움이 컸던 만큼 노을 지는 하구둑 카페에 나가 상처받은 자신을 보는 듯 눈물도 흘렸다.

외도 6년만인 2006, 복귀를 하려고 아무것도 없이 화실을 차렸다. 복귀는 정말 만만치 않았다.

그림그리기 적당한때는 한번도 없었다. 하루 하루 긴장하고 스스로 동기부여를 받기 위해 화방에 가는 일을 거르지 않았다.

화방에 가면 전시된 작품들이 있는데, 그림을 보면서 스스로를 다그쳤어요. 그림은 그려지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되리라는 믿음으로 캔버스에 바탕색을 입히는 걸 거르지 않았지요.”

기다림과 그리움은 이음 동어이다. 애타게 그림이 되기를 기다리던 그는 자신이 그리워했던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했다.

어느 날 2층 집에서 아래를 내려 보는데, 플라타너스의 가지를 잘라낸 뭉치에서 새싹이 나오는 거예요. 마치 팔 다리를 자르고 꿰매놓은 자리에서 새 생명이 자라는 것처럼요. 살아남으려는 나 자신을 보는 것 같았지요.”

나무 연작 첫 작품 ‘11시의 자화상이 그려졌으며 외로움을 위로하는 연작 도심 속의 자화상’ 30점을 그렸다. 나무가 자신이며, 스스로가 나무가 되어갔다.

1년쯤 지났는데 시민문화회관 그룹전에서 그 작품이 팔렸다. “나의 작품을 읽어주시는 분이

있다는 데에서 깜짝 놀랐고, 큰 에너지와 함께 무한한 책임감이 느껴지더라고요.”

그는 말수가 적어져 갔으나 그림에 대한 눈은 더욱 커져갔다.


시련은 빛의 세계를 선물했다.

 

나무 연작 직후인 2007년에 아버지가 91세의 나이로 돌아가셨다. 마음의 기둥이었던 아버지의 죽음은 그를 더욱 단련시켰다.

그림을 그리겠다고 돌아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아버지가 참 그립더라고요. 그 시절엔 아버지가 일을 나가시면 식구들이 밥을 퍼서 아랫목에 묻어두었었지요. 그런 아버지의 밥을 생각하면서 밥, 굴비 등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그림을 그렸지요.”

곧이어 쇼팽의 야상곡악보를 오브제로 쓰고 생각하면서 빛과 어둠이라는 상징을 표현했다. 야상곡은 어둠이고 내가 바라보는 것은 이었다. 빛에 대한 그림을 그 때부터 많이 그렸다.

아버지가 던져주었던 백지 위의 빛을 보게 하려는 화두를 풀고 나서 영감을 얻었다. 빛에 대한 생각과 스펙트럼, 프리즘, 무지개 등 빛 속의 색에 대해 의문과 함께 빛이 색을 찾는 일을 계속했다.

보석을 보면서 놀라운 경험을 했지요. 투명한 색에 빛을 주자 여러 가지 색깔이 나오는 걸 보고 그것들을 분석하고 공부하고 빛의 스펙트럼을 작품으로 하게 되었지요.”

그는 초창기에는 다이아몬드 등 우주와 함께 오는 빛을 표현하게 되었는데, 환상적인 영역을 실제 그림으로 가져왔던 게지요. 빛의 변화에서 비구상 반구상 등을 통하여 몽환적인 분위기를 가진 작품으로 표현하는 작업을 했어요.”

그는 요즘 우주의 끝을 사물을 이용하여 표현하고, 간략하고 생략하는 단순화의 단계로 들어가는 과정을 밟아가고 있다.

 

사진작가 고 채원석과 기족

 

그의 아버지인 사진작가 채원석씨는 1918년생이다. 살아계셨으면 올 해 만으로 100세이다. 200791살 때 돌아가셨다.

일제 강점기인 1932, 14살에 일본 실버카메라사 주최의 사진대회에서 입상하고, 그 다음 해에 가작으로 사진계에 데뷔하였다.

한약방을 하셨던 할아버지가 밀어주면서 서울경성공업학교에 진학하여 사진 공부를 계속하였다.

고종 황제의 친척으로 알려진 한국 사진작가 1호로 불리는 이해선 선생을 만났고, 중앙대 임흥식 선생과 함께 채원석 선생은 대한민국 2호 사진작가로 불린다.

어머니(남궁영춘)는 생존해 계신다. 1970년대 시립합창단의 전신인 어머니 합창단 창단 멤버였다. 어머니의 영향인지 자식들이 모두 음악을 좋아하고 음악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채명룡/발행인)

 

채수억 CHAE Soo-Ug

개인전 8(군산.안산.서울.전주)

2007 미술평론지 선정작가전 최우수작가상

단체전 총 295

한국미술협회 서양화분과이사. KAMA현대미술가협회. 광주신형회

대한민국회화제 회원. 전주대학교 미술과 동문전 회장. 가원회회원.

작은그림미술제운영위원.군산구상작가회.군산환경미술협회.

 

 

 

주소:전북 군산시 대학로 145 (4F) 화실

HP:010.5191.7882

E-Mail:artist-chae@hanmail.net

Cafe:cafe.daum.net/artist-ch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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