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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깊어야 새벽이 온다
글 : 채명룡 /
2017.12.01 14:16:48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어둠이 깊어야 새벽이 온다


- 군산, 종교 관광의 새 루트 개발

- 일제 강점기 수탈의 도시 이미지, 기독교 선교 전래지로 변신 시도

- 1895년 군산 수덕산에서부터 호남권 선교 발판 다져

 

근대역사의 도시 군산, 무엇이 자랑스러울까

 

일제강점기 때 쌀을 수탈당했다는 아픈 역사적 사실을 기억해야만 하는 근대역사관광의 도시 군산. 역사는 기록되어야 하고 그 사실이 변할 수는 없지만 수탈의 흔적이 지금도 뚜렷하기에 자랑스럽지 못한 게 군산사람들의 마음이다.

그런 강점과 수탈의 아픔에서 벗어나기 위한 기독교인들의 의미 있는 시도는 종교적인 호불호를 따지기 전에 신선한 소식이다. 호남기독교 전래지로서의 군산을 조명하려는 기독교계의 움직임이 그렇다. 성지순례 비슷한 종교 관광의 물결을 타고 어두웠던 군산의 이미지를 바꿀 수 있을까.

아픔이란 건 뼛속 깊이 들어가야 치유의 희망이 간절해지며, 어둠은 스스로 깊어져야 새벽에 가까이 다가선다. 실패보다 더 경계해야 할 건 스스로 패배감에 빠져드는 일이다. 요즘 군산시민들이 군산조선소 폐쇄, 지엠 위기설, 군산전북대병원 논란 등으로 깊은 실망감에 빠졌다. 시민들의 마음의 병이 깊어지기 전에 씨앗을 뿌리고 가꾸어 나가야 한다.

 

의식 있는 시민들 또한 가능성을 탐색하기 위해 잠행에 들어간 느낌이다. 잠행이란 무언가를 이루기 위한 의미이어야 가치가 있다. 그렇지 않다면 무의미한 일이며, 그로인해 현실의 치열함 속으로 돌아오기는 더욱 어려워진다. 어둠 속에서 어둠의 색이 더욱 짙어가는 이치와 비슷할 것이다. 그래서 누구나 아픔의 곁을 떠날 수 있도록 신은 견딜만큼의 아픔과 시련만 준다고 주문을 외듯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군산의 어두운 과거에 새로운 희망의 메시지를 던지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필자는 기독교인이 아니지만 군산의 이미지를 새롭게 만드는 기독교인들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어둠이 깊어야 새벽이 온다.’는 말이 있듯이 희망은 시련을 먹고 산다.

 

오만한 기독교인이라구요?

 

기독교에 대한 생생한 지식이 없는 나와 같은 일반 시민들에게 기독교는 어떤 의미일까. 종교의 신성불가침에 토를 달 이유는 없지만, 구태여 말하자면 약간 오만한 느낌이었다. 그냥 보통사람의 눈으로 본다면 그들만의 리그에 머무는 집단일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가졌다. 나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교리 해석을 달리하는 어느 신생 집단 때문에 기존의 교회들이 위기감을 갖고 있다는 뉴스도 종종 들려왔다. 다음 세대를 이어나갈 기독교인들의 숫자가 부족하다는 소리도 나왔다. 기독교인들 스스로도 선교를 위한 미래 자산이 점점 엷어지고 있다는 데 이의를 달지 않으리라고 본다. 모두가 겪는 위기의 시대이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의 자기희생이 우리 사회를 지켜 온 뿌리임은 부인할 수가 없다. 세상의 이치가 그렇듯이 그 과정에서 여러 부작용도 있었다.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기독교인들 또한 치열한 도덕성과 종교관으로 무장한 이들이 있는가하면 그렇지 않은 이들도 많았다. 어느 누구나, 드러내 놓고 말하지 않을 뿐이다.

누군들 하나님 앞에 스스로를 온전하고 깨끗한 영혼이라고 내놓을 수 있으랴. 때론 가을 하늘 곁을 떠다니는 몇 점의 구름같은 흠결을 가진 이가 보다 인간적이었음을 우리는 안다. 그 인간적인 면과 도덕성과 종교적인 가치를 지키려는 기독교 성직자들의 눈물과 한숨이 없었다면 우리 사회가 적어도 지금 보다는 더 메말라 있지 않았을까.

 

누군가는 기독교인들을 굼벵이 보듯 했을 것이며, 또 누군가는 갖은 모략도 했으리라. 기독교인들 도덕성의 기준과 종교적 가치를 흔들었으리라는 짐작도 가능하다. 그렇지만 시대를 앞서간 선교사나 희생과 봉사로 이 땅을 깨웠던 선각자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우리 모습은 기대하기 어려웠을 거란 생각은 변함없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애정과 갈증이 섞여 나오는 기독교인들에 대한 생각이 요즘은 좀 더 가능성의 무게추 쪽으로 기울어져 간다. 가을이 깊어 겨울이 문턱을 기웃거려서일까. 내가 로멘틱 해지는 건 계절 탓만이 아니다. 긴 세월, 나와 함께 해 왔던 기독교인들의 머리카락이 희끗희끗 삐져나오는 걸 보면서 교리나 도덕보다는 한잔의 막걸리를 권하고 싶어진다.

 

싱겁게스리 막걸리가 뭐냐, 양주로 하자고 한다면 그 또한 좋겠다. 내 식대로 양주 두 방울에 생수 한 컵을 섞어서 먹으면 그게 물일까, 양주일까. 모두 다 생각하기 나름이다. 자신의 기준을 하나님 안에서 지켜 온 그들의 얼굴에서 겨울의 깊이를 보고, 그들의 가슴 속에서 바이칼 호수의 냉기를 읽는다. 잣대는 대기 나름이다.

세상은 어둠과 밝음이 공존한다. 오늘이 가면 내일이고, 내일은 기다리지 않아도 온다. 시련이 깊어야 성취의 기쁨이 달다는 걸 알며, 깊고 깊은 슬픔에 잠겨봐야 기쁨에 눈물 흘린다. 잡놈이 있어야 바른 놈 귀한 줄 깨닫는다.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이다. 좋은 놈 나쁜 놈 어울려 산다. 모두가 하나님 같을 수도 없거니와 더더욱 성인군자일수는 없다. 그런 꿈일랑은 진즉에 버려야 했다. 그랬다면 오만한 기독교인이라는 생각일랑 일찌감치 감나무 아래에 묻어두지 않았을까.

 

성모님, 발바닥 신자라서 죄송합니다

 

나는 한 때, ‘나 외의 신을 믿지 말라라고요? 하면서 기독교를 향해 묵언(?)으로 대들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가소로운 일이다. 믿지 않겠다면 나만 안하면 그만이지 무슨 대들기 까지.

필자는 기독교인이 아니다. 내 안에 잠재하고 있던 약간의 반항심 비슷한 게 그 쪽으로 다가가는 걸 경계했다. 하지만 신앙의 뿌리가 같다고 하는 성당에는 나갔다. 물론 기독교와 천주교는 엄연히 다른 종교라고 주장하는 분들도 많다. 그러나 그 건 깊이 있는 분들이나 종교를 연구하는 분들의 주장이고, 나는 나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겠다.

요즘은 길 잃은 어린양, 말하자면 발바닥 신자이다. 물론 세례는 받았으니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아니 천주교적인 관점에서 보면 언젠가 돌아올 가능성이 있는 신자, 혹은 성도인 셈이다.

 

나는 프란치스코, 아내는 글라라이다. 남편이 시큰둥하니 평소 남편 대하기를 닭 소 보듯하던 마누라였지만 딱 핑계가 생긴듯하다. 슬금슬금 성당에 나가지 않더니 요즘은 나와 똑같이 길 잃은 양 신세가 되어 버렸다. 딸도 한참을 잘 나가더니만 아빠 엄마가 시큰둥하니 따라 한다.

딸을 성당으로 보내면서, 나의 예쁜 딸이 성모님 품 안에서 무엇이든 하길 바랐다. 아빠가 언제까지 같이 있어줄 수가 없다면 혹시 말썽을 피우거나, 말하자면 놀다가 자빠질지라도 성모님 안에서 이기를 원했다. 나 때문에 딸이 멀리 온 것 같아 미안하고, 또 성모님께 죄송스럽다.

 

 

개복동에서 투다리를 하면서 기자하던 남편의 자존심을 지켜주었던 아내였다. 안 가지려던 둘째를 낳자 아내는 아이를 돌보았고, 나는 언론 말단 기자로 투다리를 지켰다. 2000년이 시작되는 카운트다운을 개복동 투다리에서 함께 셌다.

그 때 우리는 얼마나 설레었던가. 그 시기를 지나면서 성당과 인연이 닿았고 예비신자가 되었으며, 몇 년 후엔 아내가 성당에 나왔다. 그 때 우리를 바라보아 주었던 원장 수녀님은 지금도 살아 계실까.

2005년에 나는 많이 아팠다. 그 때까지는 나름 열심히 성당에 나갔던 것 같다. 잘 알지도 못하지만 레지오도 나갔고, 대략 난감했지만 기도회의 나이 드신 형님들이 하라는 대로 묵주기도도 많이 했던 것 같다. 그런 가운데 죽을 만큼 아팠다.

수술을 할 정도로 병원에 온 게 기적적이란 말을 수술을 집도한 의사로부터 듣기도 했다. 천우신조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 때 방자하게 성모님, 왜 나를 아프게 만들었나요. 나를 아프게 만들었으니 나도 삐져서 성당에 안갈 거예요하고 대들기도 했다. 얼마나 치기어린 일이었는지 지금에 깨닫는다.

 

벌써 10년도 넘은 일이다. 40대 때 간암으로 죽을 둥 살 둥 했던 나는 어느 날 새벽, 성모님께 땡깡한번 부려봐야겠다 라고 작정했다. 그게 발단이다. 그 후 여섯 살 딸내미가 아빠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 수 있을 중학생이 될 때까지 7년만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간절한 바람을 담은 시 ‘7년만을 시집 봄봄에 썼다. 그 시를 읽으면서 사나이 눈물도 흘렸다.

요즘은 이만했으니 나는 다시 성모님 품으로 돌아갈 때가 되지 않았나하고 정말로, 어쩌다, 가끔씩, 생각한다. 그리고 성모님 죄송합니다.” 하고 정말로, 어쩌다, 가끔씩 빈다.

그런데 성모님이 나처럼 땡깡부리는 걸 싫어할까? 내 생각엔 꼭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우리는 성모님 앞에 너무 거룩하며, 숭고하다. 너무 각이 졌으며, 형식적이고 고지식하다. 천주교 신자들의 어머니인 성모님을 만능해결사인 울 엄니처럼 대하면 안되나? 성모님 안될까요?

내 죽어서 천당 가면 꼭 물어봐야겠다. 혹시 지옥 갈지 모르니 이렇게라도 물어보면 언젠가 대답해 주시겠지. 어쨌든 성모님, 발바닥 신자라서 죄송합니다.

 

군산, 어두운 과거를 묻고 기독교의 땅을 개척한다

위기의 군산, 경기 불황의 그늘이 깊은 이 지역에서 기독교 선교는 잘되나요? 전국에서 교회 수가 가장 많다고 하는 군산 땅이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은총도 많이 내리겠지. 안타까운 일들이 많은 내 고향 군산이 우리나라 기독교 전래의 중심축으로 재조명된다고 한다. 굴뚝 산업이 아니라 관광 산업으로 재편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일제 강점기의 흔적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도시 군산. 일본에게 쌀을 수탈당했던 대표적인 도시가 여기이다. 근대를 지나 현대에 오기까지 그런 어두운 과거를 씻거나 털고 가지 않았으며, 일제의 잔재 혹은 흔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눈에 어필하는 게 바로 내 고향 군산이다. 그래서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사슴처럼 이지저리 차이기만 하는 게 군산이 가진 오늘의 현실이다.

 

몇 년 전부터 군산은 근대역사관광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포장되어 있지만 생각하기 싫은 어두운 과거를 여과 없이 사람들에게 팔고 있다. 사람들은 모이겠지만 이렇게 군산의 어두운 이미지가 세상에 박히고 있으며, 우리의 후손들은 그런 어두운 과거의 이미지를 멍에처럼 쓰고 살아갈 것이다.

누군가 고향이 어디냐고 물으면 우리의 아이들은 군산이라고 자랑스럽게 대답하고, 군산을 얘기할 것이다. 이게 물려주어야 할 유산인가?

600여개의 교회와 10만여명의 성도들이 모여 산다는 군산. 호남지역 기독교 선교의 발상지 군산으로 재조명하면서 종교관광 루트를 새롭게 만들려는 시도가 이어진다고 한다. 기쁨인지 슬픔인지 아리송하지만 변화에 애타던 심정으로 우선 반갑다.

 

지난 1125일 오후 2시 군산시 금동 신흥교회 옆 광장과 호남지역 기독교 선교의 발상지로 꼽히는 수덕산공원에서 선교사 전킨드루를 기념하는 기념비와 표지석이 세워졌음을 알리는 기념식이 벌어졌다. 수덕산 선교부 복원 사업이 마무리되면 호남권 선교지와 의료봉사, 교육 업적을 연계하는 성지순례 탐방이라는 종교관광 루트가 개발된다고 한다.

군산시기독교연합회(회장 최광렬 목사)가 주도한 이 기념사업은 배형원 군산시의원, 전병호 목사와 서종표 목사, 김대우 장로, 박정흠 교수 등이 추진위원으로 참여했다.

호남권 기독교 전래의 출발점인 수덕산공원과 이 선교사들이 이 지역에서 처음 문을 연 구암교회’-기독교인으로 의료 봉사를 했던 이영춘 가옥’- 대야의 지경교회대야 5일장’- 비응도의 아펜젤러 기념관’- ‘비응도 해넘이를 잇는 성지탐방 코스가 개발된다고 한다. 이렇게 성지순례가 이루어지면 일제강점기 쌀 수탈의 도시라는 군산의 어두운 면이 조금은 밝아지리라고 본다. 기독교 전래의 도시라는 새로운 희망이 시작되는 관광 형태로 도시 이미지를 바꿔주는 계기도 찾아올 것이다.

 

수덕산 공원 증간에 마련한 기념비에는 이런 내용이 들어가 있다.

“18953월 기선을 타고 군산포로 추정되는 지금의 옛 한전과 세관 사이에 내린 전 킨(W.M junkin 전위렴)과 드루(A.D Drew 유대모)는 조선시대 옥구군 북면에 위치한 군산진 자리인 수덕산에 초가집 두 채를 구입하여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환자들을 치료하니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선교사는 군산에 구암교회, 개복교회, 지경교회, 송지동교회, 남전교회 등 군산을 중심으로 익산, 김제, 서천, 부여 등으로 복음을 전파하니 수많은 교회가 설립되었다.

특히 전킨 선교사는 1902년 영명학교(제일중고의 전신)와 멜볼딘여학교(영광여중고의 전신)와 예수병원을 세우는 등 군산의 교육·의료·체육·문화를 개척 발전시켜 군산이 역사·문화 근대화의 지평을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

전킨과 드루 선교사는 어느 정도 선교활동이 익숙해지자 189645일 가족들과 함께 군산에 정착하였는데, 그 곳이 바로 이 곳 수덕산 기슭이다.”

 

기념비의 내용과 함께 이런 이야기도 전해졌다. 군산 땅에 정착한 전 킨 선교사와 아들 등 3명이 풍토병에 걸려 군산에서 사망했다는 사실. 이들의 묘지가 전주의 선교사 묘지에 안장되어 있으며, 두 선교사의 발걸음을 이끌었던 구암동산에 상징적인 묘비가 마련되었다는 것도 함께.

이처럼 어두운 우리의 역사의 한 페이지에는 선교사들의 자취가 숨겨져 있다. 모두가 힘든 시기에 희생과 봉사의 정신으로 한줄기 빛이 되어주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때로 기독교인들을 오만하다고 느꼈던 적도 있었지만, 떨어진 낙엽도 다 이유가 있으며 보이는 면과 보이지 않는 면을 같이 갖고 있음을 이제는 안다.

세상은 공존하며 원인이 있어야 결과가 나온다. 오늘 전킨과 드루 선교사의 기념사업이 시작되는 걸 지켜보면서 종교적인 색깔을 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또 군산시민들의 정신세계와 깊숙하게 관련된 이런 사업을 기독교인들에게만 떠밀듯 해도 되는 건지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120여년 전 군산 땅에 와서 우리의 삶을 긍정적으로 이끌어준 선교사들의 정신을 알리는 일. 군산시 금동의 수덕산을 관광자원으로 개발하고, 호남 최초의 기독교 복음 전파 전래지로서의 군산을 기독교인들의 성지 순례의 장소로 만들어가는 일. 그게 어디 기독교인들만의 과제일까.

어지럽혀진 군산의 이미지를 바꾸어야 하는 험로가 예정되어 있다. 새로운 도전과 희망을 향한 길을 가는 데에는 종교적인 관점뿐만이 아니라 군산의 시민정신이 필요하다. 기독교인이건 천주교인이건, 또는 불자들이거나 원불교도들이건 모두가 힘을 모아주어야 할 때이다. 그게 바로 군산정신이라고 외치고 싶은 겨울 문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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