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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오전 6시,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글 : 배지영 / okbjy@hanmail.net
2016.08.01 14:36:19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그날 오전 6시,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야자 대신 저녁밥 하는 ‘고딩’ 아들 23] 할아버지와 마지막 식사

 

제규는 일반 고등학교에 다닙니다. 날마다 해야 하는 보충수업과 야자, 두 달 반 동안 고민한 제규는 담임선생님을 찾아갔습니다. 정규수업 끝나면 집에 가서 밥을 하고 싶다고요. 고등학교 1학년 봄부터 식구들 저녁밥을 짓는 제규는 지금 2학년입니다. 이 글은 입시공부 바깥에서 삶을 찾아가는 고등학생의 이야기입니다.  -기자 말  

 

“오늘 낮 12시에 수산리(아버지 어머니 집)에서 주꾸미 샤브샤브 먹습니다. 시간 되는 분들 오세요. 늦으면 주꾸미가 수영 하고 난 물에 라면만 먹습니다.”

 

지난 4월 24일 일요일 오전 9시, 남편은 ‘강호병·고옥희님 자손들’이라는 식구들 ‘밴드’에 글을 올렸다. 누구도 댓글을 달지 않았다. 남편은 개의치 않았다. 올 사람은 다 오니까. 남편은 큰시누이가 사오라는 채소 몇 가지를 샀다. 샤브샤브에 들어갈 쇠고기는 넉넉하게 샀다. 어시장에서 일하는 후배한테 갓 잡은 주꾸미도 5kg 샀다.   

 

수산리(시가) 에 갔더니 어머니만 거실에 있었다. 아버지는 친척 아저씨와 영남(제규의 사촌형, 큰시누이의 아들)이랑 셋이서 텃밭에다 생강을 심는 중이라고 했다. 남편은 곧바로 부엌으로 갔다. 제규도 장봐 온 돈가스와 샐러드 재료를 들고 부엌으로 갔다. 아기 낳은 지 열흘 된 형수님한테 해주고 싶다고 했다.  

 

“셰프님, 이거 시칠까요(씻을까요)?”

 

뒤늦게 온 작은시누이가 샐러드를 만드는 제규 옆에서 보조 역할을 했다. 목적은 따로 있었다. “제규야, 고모는 언제 초대할 거야?”라고 수없이 물었던 작은시누이는 조카가 한 음식을 자랑하고 싶어 했다. 그릇에 싸가지고 친구들한테 갈 예정. 큰시누이는 제규가 공들여서 한 음식을 왜 갖다 주느냐며 “안 돼. 우리 식구 먹을 거여”라고 했다.     

 

음식을 못 하는 나는 ‘투명인간’. 부엌에서는 낄 자리가 없다. 세 살 먹은 은성(조카 영남의 딸)이한테 갔다. 은성이는 나한테 색종이를 내밀었다. 야들야들한 목소리로 “함머니, 개구이(리) 접어요”라고 했다. 못 접는다. 그러나 ‘다재다능한 할머니’에 대한 야망이 있는 나는 은성에게 그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대신 종이학을 접었다. 

 

밥 먹을 준비를 다한 남편은 밥상을 차렸다. 몇 년 전에 대장암 수술을 한 아버지는 바닥에 앉지 못 한다. 그래서 거실 테이블에 음식을 놓았다. 친척 아저씨도 있으니까 밥상을 하나 더 차렸다. 남편은 끓는 육수에 쇠고기와 주꾸미를 익혔다. 접시에 담아서 아버지한테 먼저 드렸다. 아버지는 당신의 증손주 은성이가 먹는 모습을 지켜봤다.

 

지난 일요일에 남편이 차린 밥상은 실패, 아버지는 통 먹지 못 했다. 이번에는 달랐다. 아버지는 주꾸미도, 쇠고기도 먹었다. 어머니 눈치를 살피면서 “술 한 잔 해야 쓰겄다”라고 했다. 그리고는 샤브샤브 국물을 안주 삼아 소주 두 잔을 마셨다. 큰시누이는 부엌으로 가서 살아있는 주꾸미를 잘게 탕탕 쳐서 ‘탕탕이’를 만들어왔다. 

 

“좋다. 부드러워.”

 

아버지가 ‘탕탕이’를 먹으며 말했다. 아버지 맞은편에 앉은 어머니는 음식을 아주아주 천천히 먹었다. 여덟 살 먹은 꽃차남은 세 살짜리 은성이 앞에서 삼촌 행세를 제대로 했다. 밥상을 보자마자 불꽃같은 성깔로 “먹을 게 없어”라고 투정 부려야 하는데 참고 있었다. 제 아빠가 샤브샤브 국물에 라면을 끓이자 그나마 좀 먹었다.

 

지난 주처럼, 아버지는 식사를 마치자마자 누웠다. 오전 내내 생강을 심고, 점심에는 반주를 곁들였으니까 노곤하리라 짐작했다. 친척 아저씨는 돌아갔다. 조카 영남은 은성과 꽃차남을 데리고 안방으로 갔다. 제규는 텔레비전 리모컨을 잡고 자리를 잡았다. 나는 밥상을 치우는 남편에게 쉬라고 했다. 남편은 설거지만 남겨두고 들어갔다.   

 

“아이고, 우리 배지영이가 어쩐 일이여! 설거지를 다 하고?”

 

큰시누이가 웃으면서 물었다. 아, 억울하다. 나도 사람 도리를 아는 사람. 차려준 밥을 먹고 나면 설거지는 하는 편인데. “나도 쫌 해요”라고 우기지는 못 하겠다. 우리 집 김장김치는 십 수 년째 큰시누이가 담가주고 있다. 철철이 오이소박이, 열무, 물김치, 깻잎 장아찌를 담가주고, 각종 양념을 챙겨주는 사람도 큰시누이니까. 자주, 함께 밥 먹는 사이기도 하고.   

 

큰시누이는 제규를 불러서는 “고모랑 생채하고 깍두기 만들자”고 했다. 두 사람은 식탁 양쪽에 마주보고 섰다. 큰시누이는 제규한테 칼질을 가르쳤다. 칼을 뒤에서 앞으로 미는 듯이 살살살 움직이라고 했다. 무조건 칼질을 빨리 하는 게 좋은 건 아니라면서. 제규가 칼질 속도에 집착하고 있다는 걸 어떻게 간파한 걸까.   

 

“제규야, 고모 친구 중에 요리사가 있어. 서울 신라호텔에서 요리사로 일한 사람이여. 젊은 사람들이 계속 들어오니까 나이 오십 넘으면 설 자리가 없드랴. 올 디 갈 디 없으니까, 지금은 군산까지 내려와서 일해. 갸가 처음 주방 들어갔을 때는 프라이팬으로도 쾅 머리도 맞았디야. 어떤 식당은 양파를 산더미같이 쌓아놓고 까라고도 한디야.

 

고모는 있지, 우리 조카가 (요리를) 취미로만 했으면 좋겄어. 고모는 우리 식구들끼리 나눠 먹을라고 음식 하는 게 좋거든. 근데도 어쩔 때는 너무 힘들어. 남한테 먹이는 일은 얼마나 힘들겄냐? 요리하는 거 좋으면, 느 아빠처럼 해. 집하고 급식소에서만 하믄 되지. 요새는 잘 되는 음식점도 망해가는 참이라, 식당 차리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여.”

 

큰시누이는 제규한테 요리를 업으로 삼지 말라고, 다른 일을 찾아보라고 부탁했다. 그러면서도 겨울 무와 봄 무의 차이를 알려줬다. 시장에서 무를 사다가 되도록 얇게 써는 연습을 하라고 했다. “포 뜰 때도 감각이 있어. 칼이 여기까지 들어가는구나를 익혀”라고 했다. 생채와 깍두기 양념을 어떻게 하는지도 보여주었다. 

 

깍두기를 버무릴 때, 큰시누이는 비닐장갑을 끼려는 제규한테 처음으로 엄하게 말했다. 맨손으로 해야지 손맛이 난다고. 비닐장갑이 꼭 그렇게 깨끗한 건 아니라면서. 제규한테 “지네 아빠 닮아서 손은 겁나게 크네” 기특해하면서도 “저 어린 손, 아려서 어쩌냐”고 걱정했다. 그녀는 진짜 요리사는 치우면서 음식 하는 거라며 중간 중간 부엌을 정리했다.

 

“무슨 수업이 그래요? 참 일관성이 없어. 제규한테 요리는 하지 말라면서 뭐 그렇게 자세하게 가르쳐요?”

 

나는 큰시누이한테 항의했다. 그녀는 막 웃었다. 머쓱한지, 나보고 김치 통 좀 찾자고 했다. 우리 집, 아주버님 집, 작은시누이 집, 큰시누이 집, 큰조카네 집, 수산리 부모님 집, 모두 해서 여섯 집. 깍두기와 생채를 각각 담아야 하니까 김치 통 12개가 필요했다. 늘 하는 소리, 큰시누이는 “가져가면 통 좀 가져와”라면서 김치를 나누어 담았다.

 

소파에서 낮잠을 주무셨던 아버지는 일어났다. 거동이 불편해도 방바닥을 닦고 다니던 어머니가 부엌으로 왔다. 큰시누이는 “엄마, 이거 제규가 담은 생채야. 먹어 봐요. 맛있게 됐어”라고 했다. 매운 걸 잘 못 먹는 어머니가 마다하지 않고 먹었다. 큰시누이는 물을 마시러 부엌으로 온 아버지한테도 깍두기를 권했다.

 

"아빠, 손주가 담은 거니까 먹어 봐요. 양념은 진짜 잘 됐는데 무에 심이 들어있는 것도 있어. 그래도 맛있게 드세요.” 

 

4월 24일 일요일 오후, 특별한 건 하나도 없었다. 우리는 제규와 큰시누이가 만든 생채와 깍두기를 싸들고 부모님 집을 나섰다. “저희 갈게요. 다음 주에 올게요”라고 인사를 했다. 어머니는 우리 아이들한테 “느 엄마 힘드니까 우애 있게 지내야 써”라고 했다. 아버지는 “그리여, 고맙다. 어서 가서 쉬어라”고 했다.

 

5월 1일 일요일. 우리는 수산리(시가)에 갈 수 없었다. 군산의료원에 있었다. 아버지는 의식이 없었다. 나흘 전 아침에 하혈을 심하게 해서 입원한 상태. 발은 차가워져갔지만 혈색은 나쁘지 않았다. 밤늦게 문병 온 친척 어른이 “이러다가 좋아질 수도 있어. 금방 가시진 않아. 우리 어머니도 그러셨어”라고 경험을 얘기해 주었다. 

 

5월 2일 오전 1시쯤. 시누이들이 “애들 학교 보내야지”라면서 우리 부부한테 자고 오라고 했다. 남편은 집에 오자마자 아이들 먹을 국을 끓이고 반찬을 했다. 나는 씻고 머리를 말리고 있었다. 그때 작은시누이한테 “바로 와”라는 전화가 했다. 아버지의 맥박과 심박이 느려지는 동안 우리는 아버지한테 한없이 고마웠던 마음을 전했다. 듣고 계실 테니까.  

 

그날 오전 6시,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그 봄, 아버지는 동네 사람들과 봄놀이를 가지 못 했다. 서운해도, 화가 나도, “허허” 웃고 살아온 인생. 이웃들에게 5만 원을 희사하고는 거실에 있는 노래방 기계를 켰다. 흥겹게 노래를 불렀던 분이다. “남자가 부엌에 들어가도 꼬추가 떨어질 일이 없어”라면서 음식을 했던 아버지는 어머니를 두고 갔다. 

 

아버지가 심어놓고 간 열무와 양파는 잘 자랐다. 큰시누이는 그걸 뽑아서 김치를 담갔다.  그녀는 “아빠가 주는 마지막 김치여”라면서 나눠주었다. 2주가 지난 주말에는 새로 짠 참기름을 주면서 “아빠가 주는 마지막 기름이여”라고 했다. 다진 마늘을 냉동실에 넣고 두고두고 먹으라며 "아빠가 주는 마지막 마늘이여“라고 했다. 

 

아버지는 우리한테 음식만 남겨준 게 아니다. 아내를 아끼고, 새끼들을 예뻐하고, 이웃, 친구들과 유쾌하게 지냈던 당신의 유전자도 물려주었다. 그래서 나는 결혼하고 줄곧 남편이 해주는 밥을 먹고 산다. 지난해에 고등학생이 된 큰애는 스스로 아침밥을 차려먹고 학교에 간다. 저녁에는 식구들 밥을 차린다. 제 할아버지처럼 친구들을 불러와서 밥을 해 먹인다.       

“저 세상에서 아빠가 뭐 하고 지내실 것 같어? 이 세상에서처럼 똑같이 지내실 거야. 지나는 사람 있으면, ‘어이!’ 불러서 같이 먹자고 하고, 노래하고, 술 드시면서 유쾌하게 지낼 거야. 그러니까 울지 말자. 재밌게 지내자.”

 

작은시누이가 말했다. 울컥울컥 솟던 내 눈물이 바로 마르지는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아버지 같은 근사한 사람을 <조선 셰프 서유구>에서 만났다. 서유구는 <임원경제지>를 쓴 사람. 우리 아버지 강호병님보다 170여 년 앞서 태어났다. 명문가 출신, 그러나 서유구도, 그의 할아버지도 직접 음식을 했다. 그의 할아버지가 임종을 앞뒀을 때, 서유구는 이렇게 썼다. 

 

“좋은 집안이거나 먹고살 만한 집안에는 반드시 인품이 좋거나 학식이 뛰어나거나 돈을 버는 재주를 가진 인내심과 희생정신이 강한 남다른 할아버지가 계신다. 할아버지의 덕과 수고로 생기는 혜택은 아들인 아비보다 손자가 더 많이 받게 되는데 우리 서씨 집안도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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