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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 정의의 심장 조준호!
글 : 고경곤 / k31479@naver.com
0000.00.00 17:27:53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정의(justice)라는 낱말이 사람들 입에 자주 오르내린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닐까? 사회가 정의롭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가난하고 소외당하는 사람들만 그런 게 아니다. 

 

 정의(正義)는 불의(不義) 없이는 성립하지 않는 단어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정의는 무엇이고, 불의는 무엇일까. 재벌에게는 사내유보금을 쌓아놓는 게 정의다. 그들에게는, 일자리를 늘리기 위해 투자하라는 요구가 불의다. 조물주보다 위에 있다는 건물주에게는 임대료 인상이 정의고, 상가임대차보호법이 불의다. 

 

 반면, 어떤 국민들의 답은 이렇다. 좋은 일자리가 정의고 비정규직이 불의다. 부자 증세가 정의고 법인세 인하는 불의다. 복지 확대가 정의고, 성장지상주의는 불의다…. 참으로 자기중심적이다.

 

 우리는 지금, 자신이 처한 입장에 따라 말의 뜻을 정반대로 쓰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목격하고 있다. 정의를 세우기 위해 정의의 뜻부터 밝혀야 하리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설파했던 어느 철학자가 울고 갈 지경이다. 

 

서론이 길었다. 

 

 우리지역 군산에 사는 어떤 남자의 이야기를 쓰기 위해서다. 그는 금광동에서 태어나서, 군산초 ․ 군산북중(현 중앙중)․ 군산제일고를 졸업했다. 서울에 가서 노동자가 되었고, 30년 넘게 노동운동을 했으며, 그 덕분에 옥살이까지 했다. 진보정당의 공동대표를 역임하고, 이제 고향에서 국회의원선거 출사표를 던졌다. 그의 이름은 조준호. 그가 몸담은 당의 이름도 바로 정의이다.


 

  
 

아버지, 고 조용술 목사님 

 

 조준호의 부친은 민주화운동의 큰 어른이었던 고 조용술 목사다. 조 목사는 한국신학대학에서 대학원까지 마쳤고, 복음교회에서 목회활동을 했다. 복음교회는“조선인 자신의 교회이어야 한다”는 기치로 세운 교회다. 모친 송정옥 여사는 교육자로, 군산중앙초 교사 중,고 교사를 거쳐 음악학원, 복지관에서 음악선생님으로 83세까지 봉사했다. 지금도 따르는 제자들이 많다고 한다.

 

 특히 어린 조준호에게 바른 기운을 불어넣은 사람은 역시 아버지였다. 조 목사는 기독교농민회 이사장, 산업선교회 활동을 하면서, 고통 받는 노동자와 농민에게 관심과 애정을 기울이던 인권운동가였다. 그 당시에는 그것이 정의였고, 그 누구도 거기에 이의를 달지 않았다. 

 

 조준호의 부친, 조용술 목사는 민주화와 통일운동에 헌신하다가, 2004년에 향년 84세로 타계했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서민과 민중과 함께 사는 게 옳다. 어려서부터 그게 중요한 화두였어요. 아버님 덕분이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조준호의 꿈은, “민중 예수”였다.  

 

 날 때부터 노동자는 아니었다.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궁색하지도 않았다. 철들기도 전에 상경해서 공장에 취직해야 할 정도는 아니었다는 뜻이다.1977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친구와 함께 무작정 서울로 올라갔다.

 

“그때 당시에 판자촌 철거를 많이 할 때였어요. 면목동, 사당동, 뭐 이런 곳. 철거민과 함께했던 목사님들이 우리 집에 와서 이야기를 하시는 걸 듣고, 나도 철거민과 함께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논리적으로는 못 따라가도, 감수성이 예민한 나이다보니 마른 솜이 물을 빨아들이듯, 사춘기 소년의 머릿속으로 정의의 외침이 스며들었다. 입신양명(立身揚名)의 야망은 일찌감치 버렸다. 가출 아닌 가출이 된 셈이었는데, 막연했다. 정의에는 눈을 떴지만, 그것을 구현할 방도를 몰랐던 것이다. 배고픔이 뭔지 알게 되었고, 여기저기 도시의 뒷골목을 경험하기도 했다. 방종은 아니었으되, 생각지도 못한 방황 앞에서 “어린 예수”는 난생 처음 쓴맛을 봤다. 발길을 잠시 돌려, 군대에 갔다. 그게 1979년 초의 일이었다. “10․26”, “12․12”, “5․18”. 그가 강원도 철원 포병부대에 있는 동안, 한국 현대사의 물꼬를 비튼 사건들이 연달아 터졌다. 

 

 워커 끈을 풀기 어려울 정도의 비상이 계속됐다. 그리고 광주항쟁 소식을 듣고 막막했던 정의의 길은 민주화로 좁혀졌다. 

 
 

“형제여! 우리는 굴종을 거부한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많이 일하고 제일 대접 못 받는 노동자들이 민주화의 주역이 돼야 한다는 결론쯤에  제대하고 노동운동에 투신할 준비를 했다. 대학생들 중에도 그런 이들이 꽤 됐다. 평생의 반려가 되어준 아내 이미숙과 만난 것도 그때였다. 전북대 다닌다고 했다. 학습을 함께 하며, 서로의 심성을 익혔다. 왠지 기분 좋은 예감이 들었다. 그렇게 해서 잡은 첫 직장이 영등포의 철공소. 미래의 아내는 청계천 봉제공장에 취직했다. 

 

 조준호는 새로운 눈을 떴다. 어느 나라 노동운동의 역사를 봐도, 대공장 남성노동자들이 조직되고 나서야 노동자들은 시민 대접을 받았다. 그래서 들어간 곳이 기아산업 직업훈련소였다. 이로써 30년 넘게 이어진 기아자동차와 인연의 시작이었다.  

 

 첫 월급이 10만원 조금 넘었다. 잔업, 철야 다 하고 받은 액수가 그 정도였다. 방값이 7~8만원인데…. 그의 기억에 따르면, 그 무렵 대공장의 임금수준은 중소기업보다 오히려 낮았다고 한다. 근로조건도 형편없어서 숫제 군대나 다름없었다. 두발까지 통제했다. “3저 호황”을 불과 1년도 안 남긴 시점. 공장 안은, 누가 부싯돌만 부쳐도 폭발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조준호는 직업훈련소 동기들과 머리를 맞댔다. 정치적 상황도 심상치 않게 돌아갔다. 국민의 바램을 전두환은 “4․13 호헌조치”로 짓밟았다. 그로부터 며칠 뒤, 조준호는 기아자동차 소하리공장대식당 탁자 위로 뛰어올랐다. “임금인상 하고, 근로조건 개선하라!” 식당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노동자들도 소식을 듣곤 이리로 몰려왔다. “이제 됐다!” 조준호는 분노와 설렘으로 반짝이는 수천의 눈동자 앞에서 사자후를 토해냈다. 

 

“형제여! 우리는 굴종을 거부한다! 노동자 민주주의 만세!” 마침내 일하는 사람들이 일어섰다. 그것은, 이 나라의 민주주의가 숨을 다하지 않는 한 결코 지워지지 않을 역사의 한 장면이었다. 

 

노사관계는 궁극적으로 상생관계 

 그의 연설은 멈출 줄 몰랐다. 동료 한 명이 다가와 물 컵을 내밀었다. “물이라도 한 잔 마시고 하라는 거예요. 잡히지 말라고. 자기는 작업 들어가야 한다고 미안하다면서….” 조준호는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동료의 애잔한 눈빛을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이 사건으로 그는 구속되어 해고됐다. “6월항쟁”으로 열린 민주화 공간에 힘입어 풀려나온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기약 없는 복직투쟁. 그는 해고된 동료들과 함께 “전국구속수배해고노동자원상회복투쟁위원회(이하 “전해투”)”를 결성해 집행위원장을 맡는다. 

 “전해투”는 억압받고 상처받은 노동자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갔다. “그 옛날의 “어린 예수”는 어느덧 “일천만 노동자의 선봉장”으로 성장해 있었다. “대공장연대회의”를 조직해 민주노총으로 가는 주춧돌을 놓는가 하면, 노동자의 목소리를 담을 월간지 <사람과 일터> 창간을 야심차게 준비했다. 

 

 그의 신상에도 변화가 있었다. 그와 함께 노동운동을 하자고 맹세했던 전북대생 이미숙은 대학생출신이라는 게 드러나 몇 차례 해고를 겪으면서도 노조위원장으로 활동하다 수배로 갈 곳이 없던 조준호를 따뜻하게 품에 안아주었다. 그들은 존경과 신뢰로 둘만의 미래를 설계해갔다. 

 

 이윽고 첫딸 선아가 태어났다. 혼인신고도 못했고, 수배중인지라 출생신고도 할 수가 없었다. 셋이서 함께 자취방에 누워 있노라면, 이제는 아내인 후배는 “내가 유령 두 명과 함께 누워 있네…”라며, 혀를 차곤 했다. 그때의 가여움과 미안함은 아직도 그의 가슴속에 남아 있다. 1993년 12월, 조준호 이미숙 부부는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렸고, 이 또한 수배 중의 ‘사건’이었다.

 

 조준호는 2006년 2월, 제6대 민주노총 위원장에 당선됐다. 상황은 아주 나빴다.  정부와 여당은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기간제법을 황당하게도 “비정규보호법”이라고 부르며 국회통과를 시도했다. 그는 무려 열 차례의 파업 명령을 내리며, 이를 막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으나 역부족이었다. 

 

 “회사가 발전해야지 고용이 안정되고 삶도 나아진다. 너무도 당연하고, 이 점에서는 노동조합과 경영진 사이에 이견이 없어요. 노동조합과 회사는 대립적 관계가 아니라는 게 민주노총 위원장을 한 내 생각입니다. 노사관계는 상생관계이고,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갈등을 대화와 협상으로 풀어야 합니다.” 

 

 그는 또한 노동조합의 목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지속가능한 성장”을 도모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노동조합의 충고를 들었다면, 우리 기업들이 “IMF 사태” 때 벼랑 끝까지 몰리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한다.

   

 군산을 바꾸면 대한민국을 바꿀 수 있다 

 “비정규양산법”을 막는 데 실패하면서, 조준호는 정치가 바뀌어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절감한다. 새가 두 날개로 날아가듯이, 그는 우리 정치도 진보와 보수의 양 날개로 혁신을 펼쳐야 하며 그 혁신은 민주화의 본산인 호남에서 이루어질 때 비로소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가 존경하는 정치인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다. 개인적으로도 무척 가까운 인연이다. 그의 부친 고 조용술 목사는 김 대통령의 민주화운동 동지였다. 어렸을 적부터 “행동하는 양심”에 감화된 바가 크다는 것이다. 외국 정치인으로는 만델라다. 그의 자서전을 김 대통령이 손수 번역했던 것을 떠올리면, 고개가 끄덕여지는 대목이다. 

 

 

조준호에게는 세 개의 타이틀이 따라다닌다. 첫째가 노동운동가, 둘째가 진보정치인 그리고 마지막이 자동차산업전문가. 앞의 두 개는 쉽게 납득이 가지만, 자동차산업전문가라니? 그것과 노동운동, 진보정치가 대체 어떻게 연결된다는 것인가? 

 

“그게 바로 편견입니다. 산업을 모르고서는 노동조합운동 제대로 할 수 없어요. 내가 자동차노조연맹 위원장을 맡은 적이 있습니다. 특히 외환위기 직전의 기아자동차 사태 한 가운데 있으면서 공부를 많이 했어요. 공부하지 않으면 노동조합 위원장 못합니다.”

 

 자동차 1대에는 약 3만개의 부품이 들어간다. 현재 경제의 화두가 일자리라고 할 때, 후방효과가 가장 강력한 산업이다. 정부가 차세대 성장 동력으로 꼽고 있는 미디어통신이나 바이오헬스산업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자동차산업과 관련해서, 내수시장은 사실상 포화상태에 달했고 북미와 유럽시장 역시 만만치 않지만, 중국과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아시아시장은 아직도 열려 있고, 이를 겨냥하기 위해서는 국내기지를 강화해야 한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기아자동차 4공장을 군산에 유치하겠다는 공약을 냈습니다. 부지도 충분하고 중국도 가깝고, 수출항이 있는 군산이 최적지에요. 미래형 자동차산업의 메카. 이게 새만금의 미래가 돼야 합니다. 작년에 현대기아차그룹이 81조 투자계획을 발표했어요. 이 중에서 10조 정도를 군산에 투자하면, 지역경제 살리기와 일자리 만들기,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습니다. 공장 신설은 노조와 협의를 해야 해요. 이 점에서도, 제가 적임자입니다.”

 

 조준호는 군산에 기아자동차라는 신형엔진을 장착해 고향의 도약을 이루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군산에는 대한민국의 문제들이 그대로 투영돼 있다. 좋은 일자리를 많이 만들어 젊은이들이 태어나 자란 곳을 등지지 않게 만들어야 한다. 군산을 바꾸면 대한민국을 바꿀 수 있다는 게 그의 결론이다.

 

 고향에 돌아온 그는 요즘 즐겁다. 동창들을 만나서 푸근하고, 군산여고 26회 출신인 어머니의 제자들을 만나는 것도 반갑다. 다만, 정의당이 지역정가에서 확실한 대안으로 주목받지 못하고 있는 게 안타깝다. 군산 시민이 승리하는 정치가 조준호가 말하는 정의다.  저를 돕는 봉사자 한 분이 이렇게 말 하더군요 “우직하고 현명한 사람의 꿈은 많은 이의 삶에 위로가 되듯이 형님의 꿈이 그동안 저의 힘겹고 지친 삶에 위로가 되어 봉사를 결심 했죠.”라는 한 후배의 말과 매거진군산이 시민에게 오래오래 사랑받는 언론이 되길 바란다며... 인터뷰는 끝이 났다. 

 

                              

 

                          

                       고 은 시인 <만인보> 중에서    

                                            

                무턱대고 너그러운 옛 마을 촌장

           혹은 대륙에 막 정착한 종족의 추장 이었다

           복음교회 지도자 이다가

           인권운동에 나서는데

           그가 참석한 자리는 늘 훈훈하다

           각박하기만 한 시대

           그가 있는 자리는 늘 든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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