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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주인이 여기서 평생 장사하라 그랬어요”
글 : 배지영(시민기자) / okbjy@hanmail.net
2016.01.01 17:05:22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친구들 집을 보면, 방이 몇 개씩 있잖아요. 근데 우리 집은 한 개야. 문 열면 바로 길가예요. 단칸방에서 부모님이랑 셋이 살았어요. 어린 나이에도 너무나 돈이 벌고 싶은 거예요.” 

 

 

“돈 벌려고 그래요. 지금은 할 수 있는 게 이 일 밖에 없다고요!”

열아홉 살, 동대문에 있는 식당에서 배달 알바를 하던 세영씨는 친구들처럼 수능시험을 봤다. 강원도에 있는 한 전문대학 사진과에 원서를 넣었다. 합격! 알고 보니 미달이었다. 그는 사진을 전혀 몰랐다. ‘사진관 하면 돈 많이 번다’는 막연한 정보만 알고 있었다. 친인척들이 마련해 준 돈 500만 원으로 카메라 사고, 등록금 내고 대학에 갔다. 1999년이었다.

세영씨는 ‘엄청난 돈을 쓰고 왔으니까 열심히 하자’는 생각으로 학과 공부에 매달렸다. 찍고, 현상하고, 인화해서 사진으로 나오는 게 매번 신기했다. 그러나 사진을 많이 찍으면 필름 값도 많이 든다. 셔터를 누를 때마다 심사숙고 했다. 친구들이 “점심 먹자”고 하면, 그는 슬그머니 빠졌다. 세영씨의 처지를 아는 형이 “이리 와. 내가 사줄게” 챙겨준 적도 많다.

“1학년 마치고 군대 갔어요. 생각 많이 했죠. 스튜디오에 취직하면 초봉이 30만 원이에요. 사진관 차리려면 돈이 많이 들고요. 제대하고 복학은 안 했어요. 충무로에 있는 사진학원 조교로 취직했어요. 학생들에게 카메라 자재 빌려주고, 관리하고, 인화액이나 현상액 타서 약품 관리를 했어요. 강의실 세팅하고, 조명 설치도 하고요. 가끔은 카메라 수리도 했죠.”

돈을 많이 벌고 싶은 세영씨. 사진학원에서 퇴근하고는 웨이터로 일했다. 5개월쯤 이어진 ‘투잡’ 생활, 이십대 초반의 건장한 청년 몸도 견디질 못했다. 둘 중에 하나를 골라야 했다. 기준은 돈. 세영씨는 웨이터 일을 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부모님이 말렸다. 곧 그만두고는  온갖 알바를 했다. 일만 있다면, 하루에 몇 탕씩의 알바라도 했다. 

2002년, 스물세 살이 된 세영씨는 친구가 소개해준 가게에 취직했다. 다른 곳보다 시급이 두 배나 많았다. 테이블도 몇 개 안 되는 가게는 와인과 커피를 파는 곳. 오는 손님들도  격이 다르게 느껴졌다. 우리나라 최초로 ‘월드 바리스타 챔피언십’에서 출전한 여대성씨가 오픈 컨설턴트 겸 바리스타로 일하고 있었다.

 

“전에는 험한 일도 많이 하면서 전전했잖아요. 거기는 완전 달랐어요. 일도 체계적이었고요. 싱크대에 설거지 그릇 놓는 위치까지 있는 거예요. 서양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아주 디테일하게요. ‘내가 여기서 잘리면 안 되겠구나’ 생각했죠. 살아남기 위해서 가장 잘 나가는 커피를 배우고 싶었어요. 안 가르쳐주니까 어깨 너머로 계속 보고, 주워들었어요.”

그가 유일하게 커피기계를 만질 수 있는 점심시간. 잽싸게 밥을 먹고 에스프레소를 뽑아서 여대성씨에게 “드세요”라고 했다. 여대성씨는 커피기계 소리만 듣고도 맛을 아는 사람, 거절했다. 세영씨는 속으로 ‘야박하고 못된 인간’이라고 욕했다. 그래도 점심때마다 에스프레소를 뽑았다. 여대성씨는 몇 개월 만에 세영씨 커피를 받아들면서 “음~”이라고 했다.

세영씨가 뽑아주는 커피를 사 먹는 손님도 생겼다. 2년간 긍지를 갖고 바리스타 일을 했다.  그러나 딱 먹고 살 수만 있었다. 그는 ‘음식을 배우면 더 낫겠지’ 생각하면서 파스타 가게에 주방보조로 취직했다. 주인은 이태리에서 10년 동안 공부하고 일한 사람. 최상의 재료를 쓰면서도 음식 값은 비싸지 않았다. 퍼주듯 운영한 가게는 오래지 않아서 문을 닫았다.  

“그러고 나서 청담동에 테이블 세 개짜리 레스토랑으로 갔어요. 사장인 형이 15년 동안 외국 여행을 다녔대요. 음식 하는 건 좋아하는데 장사는 처음이래요. 저보고 도와달라고 했어요. 그 형은 영어 요리책을 사부로 여겼어요. 그걸 보고 프랑스 가정식을 만들었어요. 제가 먹어보고 뭐가 부족한지 얘기를 했죠. 형이 ‘너 미각 좋다’면서 메뉴도 같이 만들게 됐어요.

둘이 꿍짝꿍짝 하면서 2년간 예약제 레스토랑을 했죠. 저는 파스타랑 스테이크를 하고요. 제 요리가 많이 늘었어요. 당시에는 그런 식당이 드물었어요. 유명한 분들도 손님으로 왔고요. 근데 이 형이 갑자기 ‘나 외국 가야겠어. 이거 네가 맡아서 할래?’ 물어요. 합리적인 가격이었지만 저는 돈이 없으니까 다른 주인이 왔죠. 새 주인이랑도 1년간 일하고 나왔어요.”

세영씨는 다시 커피 일을 하러 갔다. 200평 넘는 강남의 한 카페. 무료 발레파킹에 음료는 무한리필을 해주는 곳이었다. 바리스타는 세영씨 혼자뿐. 밥 먹을 시간조차 없었다. 그는 서빙 하는 여덟 명과 지배인에게 일의 체계를 알려주며 1년간 일했다. 얼마 안가서 드라마 <커피프린스 1호점>이 유행했다. 수많은 바리스타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너, 나가!”

카페 주인들은 얼마든지 값싼 바리스타들을 쓸 수 있었다. 경력 많은 바리스타의 노하우는 몇 달 만에 알아내고 해고했다. 그의 나이 서른 살 무렵, 차라리 수명이 짧은 오픈 컨설턴트가 되었다. 개업하는 카페의 공사 현장에서부터 일했다. 시스템을 잡고, 메뉴를 개발하고, 직원 교육을 했다. 가게 매출이 안정되면, 주인은 월급을 많이 주는 세영씨부터 내보냈다.  

그는 하루에 열 곳 넘는 카페에 면접을 보러 간 적도 있다. 그때, 아는 형이 전화를 했다. 군산에 내려가서 레스토랑 ‘파라디소’를 할 거라면서 “커피 기계를 뭘 써야할까?”라고 물었다. 세영씨는 같이 내려가자고 했다. 친구들은 세영씨에게 “지방 내려가면 (서울) 못 올라와”라고 말했다. 세영씨는 내려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

“2011년에 군산 왔어요. ‘뭐~여?’ 사투리 쓸 줄 알았는데 안 쓰더라고요. 새로운 가게는 시스템부터 잡아야죠. 직원이 열다섯 명인데 교육할 때 그랬어요. 명절 때 집에 손님 오신 것처럼 대하라고요. 그래야 지치지 않고 일한다고요. 이탈리아 정통음식과 나폴리 피자가 메뉴인데 저는 커피와 요리를 했어요. 1년만 하고 서울로 가려고 했는데 3년을 일했어요.”

늘 다른 사람의 가게를 돕던 세영씨, “네 걸 한 번 해봐” 권하는 말이 다가왔다. 세영씨는 가게를 연다면, 군산 월명동의 오래된 가정집을 식당으로 꾸미고 싶었다. 손님들에게 초대받아서 식사하는 느낌을 주고 싶었다. 자리는 좀처럼 나지 않았다. 그를 군산으로 이끌었던 ‘파라디소’ 사장 형이 건물을 보여주었다. 너무나 외진 자리에 있는, 몹시 오래된 집을.

 

세영씨는 마음에 딱 들었다. 옆에는 <1박 2일>에도 나온 적 있는 식당 ‘안동집’이 있었다. “대박 집 옆에는 쪽박 아니면 대박이야”라며 잘 되기를 기원해주는 사람들도 많았다. 세영씨는 가게 디자인을 직접 했다. 옛날 집이어서 작은 방이 있는 막힌 구조였다. 그걸 살렸다. 테이블 다섯 개에 바 테이블 하나짜리 가게. 이름은 ‘벽돌집’이라고 지었다. 

“집 주인이 자기 건물 이쁘게 해줬다면서 ‘여기서 평생 해라’ 그랬어요. (웃음) 월세도 저렴하거든요. 저희 집 대표 메뉴는 단호박 파니니예요. 파스타, 리소토, 스테이크도 하고요. 샌드위치는 계절에 맞게 나와요. 커피는 부드러운 걸 추구하고요. 음식은 여러 가지로 맛을 내는데 커피는 한 가지로 여러 맛을 내요. 그러니까 일정한 맛을 내는 게 기술이에요.”

세영씨가 서울에서 십여 년 간 커피 일을 할 때, 몇몇의 손님은 그가 옮기는 카페마다 찾아왔다. “세영씨가 해 주는 커피 마시러 일부러 왔어요”라는 말을 했다. 지방이라고 왜 그런 ‘아름다운 고객’이 없겠는가. 그와 인터뷰를 하던 월요일 오후 3시, “전주에서 일부러 여기 커피 마시러 왔어요”라는 여자 손님을, 나는 목격할 수 있었다.

 

군산은 세영씨에게 제 2의 고향. 부모님도 ‘벽돌집’에 와 봤다. 아들이 하는 일을 ‘식당 뽀이’라고 싫어했는데 지금은 인정해 준다. 밤 12시까지 서서 일 하고, 제 때 밥을 못 먹고, 남들 쉴 때 일하고, 로션을 바를 수 없어서 겨울에는 손이 터지는 아들의 삶을 격려한다. “식당이 외져서 손님들이 오시겠냐? 간판이 작아서 보일까?”라는 걱정을 하면서. 

세영씨는 “야, 어디에 식당 생겼대. 가보자” 하며 찾아와 주는 군산 사람들의 호기심이 좋다. 커피를 배우고 싶다며 구체적인 목표를 갖고 오는 사람한테는 싹 가르쳐 준다. 센스 있는 젊은이들은 금방 따라온다. 세영씨가 생각하는 커피는 경험과 내공. 얼마만큼 로스팅을 해보고 커피를 뽑아봤는가로 맛이 달라진다고 본다. 그러니 터놓고 가르친다.

자기만의 특색을 가진 작은 가게들. 세영씨는 “많이 생겨야죠. 그래야 손님들한테 좋죠”라고 했다. ‘벽돌집’에는 ‘오늘의 파스타’가 있다. 메뉴를 여러 개 하고 싶어도 그의 주방은  좁다. 쓸 수 있는 화구도 두 개다. 토마토, 올리브, 크림, 세 종류의 파스타를 할 여건은 안 된다. 예외는 있는 법, 아주 바쁘지 않으면 메뉴에 없는 리소또나 다른 파스타도 한다.

“제가 꿈꾸는 게 있어요. 손님들이 다른 메뉴 안 묻고 ‘오늘의 파스타 주세요’ 이러는 거요.  맛있게 드시고 접시 딱 비우는 거요. 나중에는 ‘오늘의 요리’를 내고 싶어요. 사람들이 ‘내일 벽돌집 가면 뭐가 있을까?’ 궁금하게 여겼으면 좋겠어요. 항상 새로운 음식이 있고, 맛은 보증된 가게요. 한 마디로 믿음 있는 가게가 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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