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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 ‘시문학의 산실’이었던 빵집 이성당
글 : 오성렬(자유기고가) / poi3275@naver.com
2015.09.01 14:53:14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이성당은 중앙로를 경계로 군산 시청과 마주 보고 있었다. 군산의 요지로 점포를 옮긴 이씨는 숙달된 제과 기술자를 고용하여 다양한 제품을 만들어낸다. 그는 제과·제빵에 필요한 재료를 취급하는 ‘삼성상사’ 사장도 겸한다. 삼성상사는 군산 지역 제과점 업주들이 밀가루와 설탕 등을 손쉽게 공급받기 위해 설립한 주식회사였다. 본사는 군산시 신영동(구시장 근처)에 있었으며, 규모가 제법 큰 업체였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성당이 번창하자 이씨 부모 고향인 남원에서 인척들이 올라와 제과점 일을 돕는다. 군산에서 기반을 다진 이씨는 다른 사업(1962년 ‘증권파동’ 때 부자가 된 것으로 알려짐)을 시작하기 위해 상경하면서 경영권을 조천형(조성용 대두식품 사장 아버지)씨에게 넘긴다. 1979년 조씨가 작고하자 그의 부인 오남례 씨와 아들 조성용이 차례로 물려받는다. 그리고 지금의 김현주 사장(오남례 씨 며느리)이 2003년 경영권을 넘겨받아 오늘에 이른다.

신식 멋쟁이들이 드나들었던 이성당


이성당에 들어서면 눈과 코를 자극하는 유혹에 빠져든다. 주범은 찬란한 광채를 발산하는 다양한 빵과 과자들이다. 재수가 좋은 날은 앙금빵(단팥빵)과 야채빵도 만날 수 있다. 처음 방문하는 손님은 쟁반에 주워담은 빵을 어디에서 계산해야 할지 헷갈린다. 계산대가 세 곳이나 되기 때문이다. 1번 카운터는 스낵 코너, 2번 카운터는 일반 과자와 빵, 3번 카운터는 택배 및 예약 주문을 받는다. 그중 2번~3번 카운터 사이가 옛날 전원다방이 있던 자리다.

미군 깡통경제가 군산을 좌지우지하던 시절, 전원다방은 항도의 신식 멋쟁이들이 들락거리며 서양식 흉내를 발산하던 곳이었다. 다방 주인은 옥구군(군산시) 옥봉 지서장으로 근무하다가 경찰생활을 그만둔 홍원식 씨였다. 그는 음악을 좋아하는 손님에게 계란 노른자위가 둥둥 떠다니는 모닝커피를 서비스할 정도로 고전음악 애호가였다. 군산여고와 이대 음대를 졸업한 홍씨 아내는 클래식을 틀어 다방의 격을 높여주었다 한다.

전쟁과 피난, 휴전 등 격동의 1950년대 군산 사람들의 애환이 고스란히 담긴 전원다방은 1960년대에 ‘영진상회’로 간판이 바뀌고, 1980년대 이성당이 인수, 확장해서 오늘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해방과 함께 한반도가 남북으로 분단되듯 1948년 둘로 나뉘었다가 다시 하나로 합쳐진 이성당 건물. 얘깃거리가 일제강점기 ‘이즈모야’만큼이나 풍성한 그 절반(전원다방)의 세계로 시간 여행을 떠나본다.

전원다방과 고은, 그리고 토요동인회

군산중학교 4학년을 중퇴한 고은태(아래 고은)가 군산항 미군 항만사령부에 근무하면서 자살, 밀항 등에 실패하고 ‘항구의 방랑자’로 떠돌던 피난시절. 국민 동요 <반달>을 작곡한 윤극영 선생을 우연히 만나 새로운 기(氣)를 받았던 장소가 전원다방이다.

윤극영은 한국전쟁(1950~1953)이 터지자 군산으로 피난, 구형택시 4대를 가지고 중앙로에서 택시회사를 경영하고 있었다. 그는 첫 만남에서 고은이 시를 쓴다는 얘기를 듣고 ‘항구에는 시인이 있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항구가 쓸쓸하지’라고 격려한다. 그 후 두 사람은 매일 만나다시피 하였고, 윤극영은 고은에게 하얼빈과 동경 유학 시절 경험담을 들려준다.

고은은 손님들에게 ‘솔베이지’란 별명을 얻을 정도로 다방에 자주 다녔다. 전원다방은 열아홉 애송이 고은이 군산 북중학교 국어·미술 교사로 특채됐던 현장이기도 하다. 윤극영 선생을 만나러 매일 다방에 나오던 이종록(전 광동학원 이사장) 선생이 약관의 고은에게 교사로 와달라고 제의했던 것.

 

“시청 앞에서 어디를 갈까 하다가 ‘이 과자점’(이성당) 앞에서 뜻밖에 전학배 씨를 만났다. (줄임) 나는 틈만 나면 거기(전원다방)에 갔다. 다방이란 참 좋은 것으로 생각했다. 그것은 선술집만큼 좋지 않았으나 다리미질한 양복만 입으면 의자에 몸을 깊숙이 파묻고 담배를 피우는 거드름이 아주 그럴듯하게 보였다.(줄임) 다방 아가씨는 모든 남자의 눈길을 한데 모으고 있었다. 허술한 옷을 입고 왔던 아가씨가 2주일만 지나면 아주 근사한 투피스를 입고 둔부의 동작이 볼만해진다. 이 다방에서 이종록 선생을 만날 수 있었다.” -1991년 8월 29일 자 <경향신문>에서

중학교 국어·미술 선생님이 된 고은은 학생들 수업이 끝나기 무섭게 전원다방을 찾는다. 학교 숙직실, 월명산 공자묘, 양조장 사무실, 병원 대기실 등을 전전하며 침식을 때우던 그가 속눈썹이 유난히 길고 키가 훤칠했던 다방 아가씨에게 반했던 것. 그러나 그는 고백 한마디 못하고 <솔베이지의 노래>만 청해 들었다고 술회한다.

당시 전원다방 분위기는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뜬구름 잡기로 차 있었다고 한다. 어쩌다 임시수도 부산에 다녀온 사람은 미국에서 박사학위라도 받아온 것처럼 자랑을 늘어놓았다. 피난민촌 대폿집에서 막소주 한 잔 걸친 것을 ‘광복동, 남포동 술맛이 좋더라.’며 떠벌렸다. 옆에서 듣고 있던 사람은 ‘아 나도 부산에 한번 다녀올 일이 있는데’라고 풍을 쳤다. 피난시절 군산의 다방은 그처럼 허장성세로 가득 차 있었다.

군산 시문학의 산실 ‘토요동인회’와 고은이 인연을 맺은 곳도 전원다방이다. 그는 어느 날 윤극영 선생을 만나러 갔다가 목련 송기원과 극적으로 해후한다. 고은은 다방 입구에서 중후한 중년 신사와 부딪친다. ‘실례했습니다.’ 소리가 두 사람 입에서 동시에 나온다. 그리고 웃으면서 인사를 나눈다. 나이 차이에도 서로 끌어당기는 정서가 팽팽했다. 목련은 ‘나는 시를 쓰는 사람이요, 폴 발레리의 시를 좋아하지요’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자주 만나자며 ‘다음에는 당신의 시를 보고 싶으니 써놓은 것을 가져오라’고 말한다.

 

고은은 훗날 ‘전매청 군산지청 감시과장이던 송기원은 목소리가 그윽했고, 손눈썹은 우수로 젖어있는 것 같았다’고 추억한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예술가로 느껴졌다는 것. 다른 사람에게서 느끼지 못했던 높은 기품과 깊숙한 정의(情誼)로 이루어진 인격 앞에서 흠뻑 행복해지기까지 했다 한다. 고은은 목련의 격려와 권유로 토요동인회에 가입한다. 그 후 개복동 비둘기다방에서만 가졌던 모임이 전원다방에서도 열린다.

1955년 1월에는 당시 군산 시장을 비롯해 각 기관장, 전주에서 온 가람 이병기, 서울에서 내려온 신석정, 최승범, 홍석영, 이동주 그리고 수많은 문인과 고등학생이 참가한 가운데 시화전도 개최된다. 다방 밖과 안에는 축하 화분과 화환이 가득했다. 벽에 내걸린 다양한 작품들은 방문객들 발길을 멈추게 하였다. 다방 여주인은 잔잔한 클래식으로 분위기를 띄웠다고 한다. 그때 고은은 동국사 승려가 되어 있었다.

제3회 시화전도 전원다방에서 7일 동안 열린다. 승려가 된 고은도 참여한 3회 시화전은 서울(3명), 광주(6명), 전주(8명), 이리(3명), 군산(11명) 등에서 31명이 대거 출품, 전국적인 행사로 치러진다. 이듬해에는 동인지도 펴낸다. 모임과 시화전이 반복되고 신석정의 참여가 늘면서 전주의 백양촌, 김해강, 최승범, 백초, 이리의 홍석영, 이동주 등도 가세한다.
토요동인회는 1953년 6월 출범하였다. 휴전협정 1개월 전으로 어수선한 시기였다. 창립 회원은 송기원(회장), 김순근(부회장), 정윤봉(총무), 차칠선, 육구영, 고헌, 김영협, 강중희 등. 송기원은 해방 전 만주 길림성 <만선일보> 기자였고, 김순근은 빈대떡을 엄청 좋아하는 피난민, 차칠선은 사범학교 서무과장, 고헌은 군산상과대학 교수, 김영협은 초등학교 교사, 정윤봉은 당시 호남고무 사장 부인이자 그해 2월 시집 <봄피리>를 출간한 여류시인이었다.
 
그 후 고은, 이병훈, 정연길, 김규동, 원용봉, 김장호 등이 가세, 창작 열기를 더한다. 1955년에는 가람 이병기, 신석정, 김수영 등을 초청, 중앙로 YMCA 회관에서 시문학 강연회를 이틀에 걸쳐 개최한다. 당시 캠프는 물론 전원다방이었다. 훗날 고은은 “가람 이병기, 신석정, 김수영이 바람부는 항구 군산에 온다는 것은 채만식이 머물다 떠나고, 이광수가 국토순례 때 잠깐 들른 것 말고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고 회상한다.

토착 문화가 박약했던 군산에 문학의 닻을 내린 토요동인회는 모임의 주역이었던 정윤봉이 파탄하고 송기원, 고은, 강중희, 정윤길 등 많은 동인이 타지로 떠나면서 1958년 자연 해체된다. 

당시 군산은 폭격으로 도시 대부분 폐허가 되다시피 하였다. 내항 철조망 부근에는 판잣집이 잇대어 빽빽하게 들어섰고, 그 안에는 생활력이 강한 피난민들이 꿀꿀이죽과 강냉이 죽으로 연명하고 있었다. 그처럼 전쟁의 상흔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지방의 작은 항구도시에서 여류시인이 시집을 내고 문학동인회가 결성되어 시화전 7회, 비평회 30회, 문학 강연 1회를 개최하였다. 이는 한국 문단사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사건으로 받아들여진다.

1950년대 초 전원다방은 윤극영과 신문기자들이 온종일 진을 치고 있었고, 극장에서 낮 영화를 관람하고 와서 홍차를 시키는 멋쟁이 내외도 있었다. 당시로는 대담하게 남자를 만나러 나온 군산사범학교 여교사도 보였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한 푼도 없이 차를 마시며 취직 부탁을 하고는 아가씨한테 외상으로 해달라고 했다가 ‘양민증’(주민증)을 잡히기도 했다. 1·4후퇴 때 미군 수송함(LST)이 군산항에 퍼놓은 피난민은 5만여 명. 그중 절반은 군산에 정착한다. 그래서 그런지 피난민 유지도 많이 드나들었다 한다. 

이성당을 ‘이 과자점’으로 기억하는 고은 시인. 그는 <거장, 스승을 말하다>(리더스하우스 刊)에서 은사와 제자라는 수직적 도제(徒弟) 관계를 거부한다. 이어 스승관을 우주로 확장, ‘사막과 바다, 대지가 나의 스승’이라고 말한다. 그에게는 천지 만물 모두가 문학적 은사였던 모양이다. 고은은 군사정권에 쫓길 때, 째보선창 물매기탕이 먹고 싶고, 술이 고플 때, 어머니가 그리울 때 고향 군산을 찾았다. 그래서 얘긴데, ‘군산의 산하’, 즉 전원다방(이성당)도 중앙로 거리도 그의 스승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참고서적: <빵의 백년사, 1부 군산의 이즈모야>(함한희, 오세미나 지음), <근대 항구도시 군산의 형성과 변화>(김영정, 소순열, 이정덕, 이성호 외), 최영의 <군산풍물기>, 고은 시인의 자전적 소설 <나의 山河 나의 삶>, 한국향토전자문화대전(토요동인회, 이성당), 전라문화연구 제19집. 군산부 지도(1934년), 고 하반영 화백 구술. 나필성(87) 전 <경향신문> 동경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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